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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궂긴소식

‘다음에 또 만나요~’ 약속했던 명드러머 코로나19로 작별하다

등록 2020-04-14 21:03수정 2022-03-17 12:09

지난 13일 미국 엘에이 병원서 숨져
연예인 출신 바이러스 감염 첫 희생
가수인 부인 허영란씨도 자가격리중

1971년 7인조 그룹사운드 꾸려 활동
74년 첫 음반 ‘나는 못난이’ 등 큰인기
‘또 만나요’는 지금도 폐점음악 친숙
[가신이의 발자취] 그룹 딕훼밀리 리더 서성원씨 별세

고 서성원씨의 얼굴을 내건 1976년 딕훼밀리 2집 음반 자켓. 사진 연합뉴스
고 서성원씨의 얼굴을 내건 1976년 딕훼밀리 2집 음반 자켓. 사진 연합뉴스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헤어지는 마음이야 아쉬웁지만/ 웃으면서 헤어져요/ 다음에 또 만날 날을 약속하면서/ 이제 그만 헤어져요.’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행사나 영업 마감 시간을 알리는 노래로 친숙한 ‘또 만나요’(작사 작곡 오세은)의 일부다. 이 노래를 부른 그룹 ‘딕훼밀리’의 리더 서성원씨가 지난 13일(한국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코로나19 감염으로 별세했다. 국내 연예계 출신 가운데 코로나19 첫 희생자인 셈이다.

가수 위일청은 이날 자신의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서성원님이 오늘 엘에이에서 코로나19 때문에 70살 초반 나이에 돌아가셨다”며 “저한테는 선배이자 선생님 같은 분이셨다”고 전했다. 그는 “미국에 계신 유가족분들과 40여년을 함께 했던 딕훼밀리 식구들, 그리고 서성원님을 알고 지내셨던 모든 지인들, 나아가 ‘나는 못난이', ‘또 만나요'라는 국민가요를 알고 계신 모든 분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고자 한다”고 썼다.

딕훼밀리 멤버인 가수 이천행도 14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고인이 엘에이에서 7일 쓰러져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6일만에 끝내 별세했다고 전했다. 그는 “(서성원은) 실력도 있고 사람도 아주 좋고, 추진력도 있었던 음악인이었다. 지난 1월 엘에이에 공연하러 가서 만났을 때만해도 굉장히 건강했는데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겼다”며 안타까워했다

고인의 부인이자 1980년대 초반 ‘날개'로 인기를 얻은 가수 허영란씨도 현재 자가격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1974년 그룹 딕훼밀리의 첫 음반 자켓. 맨 왼쪽이 리더인 고 서성원씨다. 사진 연합뉴스
1974년 그룹 딕훼밀리의 첫 음반 자켓. 맨 왼쪽이 리더인 고 서성원씨다. 사진 연합뉴스

고인은 앰비션스, 아이들, 라이더스 등 그룹의 세션을 거쳐 1971년 딕훼밀리를 결성했다. 드러머인 서씨를 리더로, 기타 이천행, 베이스 박수호, 키보드 문옥, 보컬 김후락·김지성, 테너 색소폰 이박무가 원년 멤버다. ‘음악을 파고든다’는 뜻의 영어 ‘디그’에서 그룹 이름을 따왔다. 그러다 1976년 박정희 독재정권의 언어순화 정책 탓에 ‘서생원 가족’으로 개명했다. 리더 서씨의 이름에 학문을 파고드는 ‘생원’을 결합시켰다고 전한다.

딕훼밀리는 1974년 발표한 첫 음반에서 ‘나는 못난이’ ‘또 만나요’를 비롯, ‘흰 구름 먹구름’, ‘작별’ 등이 줄줄이 인기를 얻어 대중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그시절 그룹으로 드물게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연속 1위를 한 덕분에 수상 경력도 화려했다. 1971년 문화방송(MBC) 가요중창상, 1973년 ‘뉴스타배 보컬경연대회’ 우수상을 받았고, 탁월한 리듬 감각을 자랑하던 리더 서씨는 개인 연주 부문 드럼상도 함께 받았다. 1974년과 75년 2년 연속으로 <월간 팝송>에서 주최한 ‘팝스 그랑프리’에서 최우수 그룹상 휩쓸었다. 대중적인 인기에 힘입어 ‘나는 못난이'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도 제작됐다. 1976년 김응천 감독의 영화 <푸른 교실>(주연 이덕화·전영록)이다.

딕훼밀리는 1974년과 75년 연속 ‘팝스 그랑프리’ 최우수 그룹상을 받았다. 왼쪽부터 매니저 박영걸, 리더 서성원, 디제이 박원웅씨. 사진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제공
딕훼밀리는 1974년과 75년 연속 ‘팝스 그랑프리’ 최우수 그룹상을 받았다. 왼쪽부터 매니저 박영걸, 리더 서성원, 디제이 박원웅씨. 사진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제공

딕훼밀리는 1976년 2집 음반도 연이어 성공했으나 1978년 일부 멤버가 탈퇴하면서 사실상 해체됐다. 고인은 1980년 솔로 프로젝트로 3집 ‘휘파람/ 흰구름 먹구름'을 낸 뒤 미국으로 이민을 가 개인 사업을 해왔다. 딕훼밀리는 2집 이후 38년 만인 2014년 디지털 음반 ‘서생원 가족'을 내고 가요계에 컴백했으나 리더 서씨는 빠졌다. 원년 메인 보컬 홍수진(본명 김후락) 주도로 6인조를 새로 꾸렸다.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는 “1970년대 그룹사운드는 청년 문화를 주도했다”며 “그시절 그룹사운드가 주로 번안곡이나 미국적인 사운드를 구사했다면, 서성원이 주도한 딕훼밀리는 창작곡 위주로 국내 인기 가요를 많이 탄생시켰다. 굉장히 친근하면서도 쉬운 멜로디로 젊은이들 문화를 리드하며 우리 음악의 시대를 열었다”라고 회고했다.

김경애 기자, 연합뉴스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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