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 김낙중 선생이 1955년 혼자 헤엄쳐 건너갔던 임진강 앞에서 그때의 기억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오마이뉴스 제공
역사는 늘 다시 씌어지고 역사적 맥락과 깊이 결부된 삶을 산 분에 대한 평가 또한 그러하다. 지난 7월 29일 숨을 거둔 김낙중 선생(글의 객관성을 위해 존칭은 생략한다.)의 삶에 대해서도 그가 젊은 날 운명적으로 맞닥뜨렸던 6‧25전쟁만큼이나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김낙중 선생을 평화통일운동의 선구자로 보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지만 그 말만으로는 진면목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목숨을 건 실천과 항심(恒心)을 함께 보아야 그 말의 속살이 차기 때문이다. 6‧25전쟁 직후 평화통일 방안을 수립하여 그것을 성사시키기 위해 임진강을 건너 월북하고 다시 돌아오고…, 그 일로 인해 북쪽에서 한 번 남쪽에서 네 번 간첩으로 몰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감옥에서 풀려나면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또 다시 최선을 다해 하던 일을 이어나가고….
1985년 ‘굽이치는 임진강’ 출간 앞서
82년 오래 묵혀둔 ‘초고’ 건네받아
“처음 읽고 시적 접신의 떨림 느껴”
2010년 서사시 엮어 ‘임진강’ 펴내
“평화와 상생의 길 찾아온 선구자”
1985년 출간된 김낙중·김기남 부부 공동 자전 수기 <굽이치는 임진강>의 표지.
선생의 남다른 삶의 역정을 내가 알게 된 것은 그와 부인의 자전적 수기 <굽이치는 임진강>을 통해서이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이 권력의 총칼을 마구 휘두르던 1982년, 그가 공들여 집필한 학술서인 <한국노동운동사 –해방후편->은 간행되자마자 판금되었다. 뒤 이어 그 책을 펴낸 청사출판사에서 내가 참여한 5월시 동인지 3집이 간행되었다. 그 인연으로 선생을 뵙게 되었고 1960년대 써놓고 오래 묵힌 채 언제 출판될 지 모르던 그의 수기를 건네받아 읽게 되었다. <굽이치는 임진강>은 그뒤 1985년 부인 김남기와 공저로 삼민사를 통해 출간됐다.
문학적으로도 문제적 개인인 젊은 날의 김낙중은 내가 쓴 서사시 <임진강>(1986년 초판·2010년 개정판)의 주인공이다. ‘민족통일의 갈망을 안고 임진강을 건너간 한 젊은이의 열정과 고난’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의 자전적 수기를 원고 상태로 처음 대했을 때 시적 접신의 떨림을 느꼈고 곧바로 시로 전환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생애 자체가 소중하였고 그 자체로 핍진하였으므로 허구를 가미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시를 쓰는 동안 계속해서 지극히 순정하면서도 강인한 영혼을 만나 동행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최두석 시인이 고 김낙중 선생의 자전 수기를 시로 풀어내 1986년 낸 <장시집 임진강> 초판본(왼쪽)과 2010년 등단 30돌 기념으로 재출간한 <임진강-최두석 서사시>(오른쪽)의 표지.
동족살해의 6‧25전쟁은 우리의 현대사를 가장 크게 규정한 사건이면서 동시에 청년 김낙중의 삶을 규정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 땅에 분단을 고착시킨 전쟁을 겪으면서 그는 민족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심리까지 지배하는 유형 무형의 분단의 철책에 순응하거나 피하지 않고 온몸을 던져 저항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에게 현실적으로 닥친 것은 북과 남에서 공히 간첩의 멍에를 쓰는 것이었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분단이데올로기를 뚫고 평화와 상생의 길을 찾는 선구자의 역할을 꿋꿋이 지극한 정성으로 수행하였다.
광주항쟁 세대인 나의 시각으로 볼 때 남한이 북조선보다 가장 돋보이는 것은 민주화운동을 통해 확보한 사회적 활력이다. 4‧19혁명과 광주항쟁과 6월항쟁과 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운동은 늘 반공 이데올로기의 공격을 받았다. 독재정권이나 공안당국은 수시로 간첩단 사건을 만들거나 북풍을 불러와 민주화운동을 억누르곤 했다. 그런 면에서 민주화운동은 역설적으로 6‧25전쟁 세대인 김낙중 선생과 같은 분들의 고난과 헌신에 빚진 바가 적지 않다. 집단적 경험의 축적에 의해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는 이미 반공 이데올로기의 공격에 저항하는 항체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2018년 4·27 남북정상회담 직후 가족들과 함께 임진각을 방문한 고 김낙중 선생. 사진 박성운씨 제공
김낙중 선생의 장례식 이튿날 그의 고향인 파주시 탄현면의 임진강 유역을 둘러보았다. 임진강은 그가 65년 전 월북했던 그 날처럼 호우로 잔뜩 불어나 굽이치고 있었다. 북에서 남으로 휴전선을 통과한 물줄기는 다시 휴전선을 향해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6‧25전쟁이 휴전된 이후 분단을 상징하는 강으로 흐르고 있는 임진강을 보며 선생의 필생의 과제-강대국들의 패권싸움에 휘둘리지 않고 우리 민족 스스로 함께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갈 길-에 대하여 새삼 골똘히 생각하였다.
최두석ㅣ시인·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