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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영혼의 깊이 일깨워준 ‘레 지 투이’ 고맙고 고맙다”

등록 2020-09-08 20:52수정 2022-03-17 12:08

[가신이의 발자취] 베트남 시인·작가·영화감독 반레를 기리며
베트남의 국민작가 반레 시인이 지난 6일 세상을 떠났다. 사진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제공
베트남의 국민작가 반레 시인이 지난 6일 세상을 떠났다. 사진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제공

베트남의 전설적 게릴라 출신 작가 겸 영화감독인 반레가 지난 6일 오후 10시45분(한국시각) 호치민에서 별세했다. 향년 71. 2000년 <한겨레21> 주창으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에 나선 한국인들의 활동을 담은 다큐멘터리 <원혼의 유혼>을 제작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은 그는 국내 번역된 장편소설 <그대 아직 살아있다면>(2002년 실천문학사) 등 작품과 초정 방문 등을 통해 20여년 동안 각별한 교류를 해왔다. 소설 <존재의 형식>(2002년)를 통해 주인공 ‘반레’를 한국 독자들에게 널리 알렸던 방현석 작가(중앙대 교수)가 추모의 글을 보내왔다.

남의 이름으로 45년을 살아온 시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 서재 앞 발코니에는 그가 사준 해먹이 매달려 있고, 창 밖에는 비가 내린다. 일주일 전 어머니의 상을 치른 내게 아직도 이렇게 많은 눈물이 남아 있을 줄 몰랐다.

18년 전 사이공에서 반레와 함께 일했던 집이 먼저 떠올랐다. 우기였고, 자주 비가 쏟아졌다. 그는 아무리 비가 많이 내리는 날도 종아리까지 잠긴 골목길을 뚫고 집으로 왔다. 종일토록 비가 내린 날이었다. 반레는 우리가 시킨 음식의 영수증을 보고 놀라며 처음으로 화를 냈다. 다음날은 하늘이 뚫린 것처럼 더 많은 비가 내렸다. 폭우를 뚫고 오토바이를 몰고 온 그의 손에 어제 우리가 한국식당에서 시켜먹은 보쌈 비슷한 베트남 음식이 들려 있었다.

“동지들, 아침 먹어야지.” 집에서 만들어 온 그 음식을 권하며 웃는 그의 표정은 어린아이처럼 장난스러웠다. “어제 음식값의 십 분의 일이야. 이렇게 잘 먹을 수 있는데 왜 낭비를 해.”

그때 반레가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비가 내리면 그가 왜 그렇게 슬픈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는지를 안 것은 일을 끝내고 헤어질 무렵이었다. 그날도 비가 왔다. “난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잠을 자지 못해. 배불리 한 번 먹어보지도 못하고 전투에 나가 죽은 친구들, 묻어주지도 못한 채 전장에 남겨두고 온 친구들….”

반레의 본래 이름은 레 지 투이였다. 하노이 남부의 아름다운 고장 닌빈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열일곱 살에 자원입대했고, 베트남전쟁이 끝난 1975년까지 10년을 전장에서 보냈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의 입대 동기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다섯뿐이었다. 레지투이는 전쟁이 끝난 이듬해 문예공모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시인으로 데뷔했다. 그러나 그는 그 시를 레 지 투이가 아닌 ‘반레’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반레는 시를 좋아한 그의 전우였다. 전쟁터에서도 시집을 주머니에 꽂고 다니며 읽고 틈만 나면 시를 쓰던 반레는 살아남은 다섯 명에 속하지 못했다. 레 지 투이는 시인이 되고 싶어했지만 시인이 되지 못한 채 전쟁터에서 죽은 친구 ‘반레’의 이름으로 지난 45년 동안 시를 쓰고, 소설을 발표하고, 영화를 찍었다.

2003년 10월 소설 &lt;존재의 형식&gt;으로 황순원문학상을 받은 방현석(오른쪽)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인 반레(왼쪽) 시인을 초청해 수상 뒤풀이를 함께 했다. 사진 &lt;한겨레21&gt; 자료사진
2003년 10월 소설 <존재의 형식>으로 황순원문학상을 받은 방현석(오른쪽)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인 반레(왼쪽) 시인을 초청해 수상 뒤풀이를 함께 했다. 사진 <한겨레21> 자료사진

그는 내 인생에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었다. 그토록 강인하면서도 그토록 따뜻하고, 그토록 진지하면서도 그토록 유머러스한 인간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반레와의 만남은 놀라움이었고, 그와 함께했던 지난 20여 년은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 그는 멀리 있었고, 자주 만날 수 없었지만 내 존재의 근거가 되어 주었다. 세상에 실망하고, 사람들에게 상처 입고, 나 자신이 싫어질 때 그가 이 지상에서 함께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용기가 생겼다. 하지만 이제 시장통에서 산 해먹을 가로수에 걸고 매는 방법을 가르쳐주던 그의 손을 다시는 잡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서재 앞 발코니에 매달린 해먹을 바라보는 내 눈에서 자꾸만 흘러내리는 이 눈물이 얼마나 이기적인 것인지 나는 안다.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를 잃어버린 두려움으로 나는 울고 있는 것이다.

레 지 투이가 살아낸 ‘반레’의 삶은 반레 한 사람이 아니라 열일곱 나이로 전쟁터에 뛰어들어 살아 돌아오지 못한 친구들 모두를 위한 삶이었다. 반레란 이름으로 그 많은 친구들의 삶을 45년이나 대신 살아낸 레 지 투이는 지금쯤 자신에게 남은 삶을 떠맡기고 먼저 떠났던 의리 없는 친구들을 만나, 시끌벅적한 환영을 받으며 신나는 재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게 틀림없다.

그래도 그를 그리워하고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한국의 친구들은 갑자기 지도상에서 ‘사이공’(호치민)이란 지명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상실감에 빠졌다는 얘기를 그에게 해주고 싶다.

그를 만나거나 그의 작품을 읽고 베트남이라는 나라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 한국인은 아직 없었다. 그는 우리에게 베트남이 지닌 영혼의 깊이와 인간이라는 존재의 형식이 다다를 수 있는 최상의 지점을 보여주었다. 그토록 잔인한 전쟁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평화에 대한 놀라운 열정, 한국에 번역 소개된 그의 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에 담긴 미래에 고뇌를 한국의 벗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반레로 살아낸 삶의 일부를 한국인들에게 할애해준 그에게 한국의 모든 친구들을 대신해서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고맙고, 고맙다. 저 세상이 있다면 거기서 다시 레 지 투이, 당신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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