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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궂긴소식

혁신적 발상으로 ‘국민주 신문’ 창간 이끈 ‘민주언론 CEO’

등록 2020-10-12 19:01수정 2020-10-15 10:17

정태기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 별세

87년 “국민모금으로 만들자” 첫 제안
한해 뒤 독립신문 ‘한겨레’ 탄생 결실
박정희 정권 때 ‘조선일보’서 내몰려
해직 시절 컴퓨터 회사 운영하기도
신세기통신·교보정보통신 대표 지내
퇴직 뒤 오대산에서 야생화농장 꾸려
1987년 10월 30일 서울 명동 YMCA 강당에서 열린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 선언대회에서 정태기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이 발언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7년 10월 30일 서울 명동 YMCA 강당에서 열린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 선언대회에서 정태기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이 발언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자유민주언론의 큰 별 하나가 졌다.

12일 별세한 정태기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시작한 자유민주언론 투쟁을 새로운 언론으로 실현하는 데 앞장 선 주역이었다.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자유언론 투사였고, 새로운 언론체를 구현한 혁신 기업인이었으며 경영에 대한 편집 독립권을 정착시킨 언론사 경영인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민주언론의 ‘최고경영자(CEO)’였다.

6월항쟁의 성과로 민주화가 눈앞에 어른하던 1987년 여름. 고인은 해직기자들을 주축으로 <말>지를 발간하고 언론민주화운동을 하던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의 마포 사무실에 두둑한 봉투를 들고 찾아왔다. 그는 민언협 회원들에게 ‘새 신문’ 창간 기획안을 발표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언론사에서 쫓겨난 해직기자들을 중심으로 새 언론매체를 창간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선언이 민주화 운동 진영 안에서 나왔으나, 누구도 이를 구체화하진 못하던 때였다.

고인이 그날 발표한 요체는 50억원의 창간자금으로 새 신문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50억원은 당시로는 거액이었지만 새 신문을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특히, 맨손으로 싸워온 해직기자들과 민주화 운동 인사들에게 50억원은 상상할 수 없는 돈이기도 했다. 이런 의문에 고인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들 참여로 모금하고, 컴퓨터 시스템을 이용한 시티에스(CTS) 도입으로 신문 제작의 인력과 자금을 대폭 절감할 수 있다고 답했다.

고인이 ‘국민주’ 모금 방식을 <한겨레> 창간에 최초로 도입한 것이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에 기반한 이 자본조달 방식은 <한겨레>뿐만 아니라, 이후 민주진보 진영의 여러 사업에서 독립성과 민주성을 보장하며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그의 ‘예언’대로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그해 대선에서 군부정권의 후계 세력이 승리하자 새 신문 창간 물꼬로 이어졌다. ‘민주화는 한판 승부가 아닙니다’라는 <한겨레신문>의 창간모금 광고는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며, 50억원 이상이 모였다. 또 한국 신문 최초로 시티에스 제작에 입각한 제조 공정을 마련해, 한글 전용 가로 쓰기 신문이 창간됐다. 그는 이 과정을 혁신과 과감한 추진력으로 끌고갔다.

대구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서울법대에서 수학한 그는 1965년 <조선일보> 기자로서 언론인의 삶을 시작했다. 주로 경제부 기자로 일한 고인의 인생은 1970년대 초반 유신체제를 수립한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으로 전기를 맞았다. 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1975년 봄에 자유언론실천투쟁 선언을 했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들이 결국 회사에서 강제로 끌려나온 뒤 해직됐다. 당시 <조선일보>에서 박정희 정권을 일방적으로 찬양하는 여당 의원의 기고문 게재에 항의하던 동료 기자들이 해직되자, 고인은 기자협회 분회장을 맡아 후속투쟁을 이어가다가 30여명의 동료와 함께 해직됐다.

해직 뒤 고인은 출판사 두레를 창업해 한국 경제의 재벌문제를 파헤치는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박정희 사망 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민주화운동 뒤 고인을 사회혼란을 조장한 언론계 대표인물로 수배해, 그는 장기간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투사에만 머물지 않았다. 새로운 산업 흐름을 파악하고 이를 혁신으로 구현하는 집행력과 추진력은 그를 범상치않은 기업인과 경영인으로도 자리매김했다. 컴퓨터가 산업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던 1980년대 초반에 그는 화담기술이라는 컴퓨터 관련 회사를 경영하며, 최신 컴퓨터 기술을 익혔다. 또 대기업인 동양화학 기획실장으로도 일하며 장치 산업의 구조나 기업경영의 노하우를 몸에 익혔다. 출판사 경영도 콘텐츠를 보는 그의 눈을 키웠다.

그의 이런 경력과 능력이 국민주 방식에 의한 <한겨레> 창간으로, 세계 언론 역사상 최초의 새로운 독립언론을 만들어내는 실무 추진력이 됐다. 1989년 <한겨레>가 방북취재를 ‘모의’했다는 이유로 이영희 논설고문 등이 구속됐다. <한겨레> 창간 뒤 관리이사로 일선 경영을 챙기던 고인은 이 위기를 다시 기회로 바꾸는 추진력을 보여줬다. <한겨레>는 시민들에게 정권의 탄압에도 흔들리지 않을 ‘제2창간’을 호소했고, 시민들은 200억원 모금으로 호응했다. 고인은 이 기회를 한겨레 사옥 마련과 대대적인 윤전 및 제작 설비 개선으로 이끌어갔다.

고인은 한겨레의 기틀을 마련한 뒤 회사를 떠나서 제2이동통신인 신세기이동통신, 교보정보통신 대표이사를 지내는 등 기업인으로 활약했다. 특히 부임 3년 만에 신세기통신을 011을 위협하는 2위 사업자로 자리를 굳히게 했다. 2005년엔 한겨레로 다시 돌아와 대표이사를 역임하며, 언론인으로서 필생의 꿈이던 한국 언론의 콘텐츠 고급화에 매진했다.

<한겨레> 퇴직 뒤 대산농촌재단 이사장을 지내고 오대산에서 야생화 농장을 꾸렸던 고인은 수년 전부터 노환으로 고생했다. 자유언론투쟁부터 혁신 중소기업 창업, 한겨레 창간, 대기업 경영인으로서 그는 때때로 너무 앞서나간다는 비판과 시샘을 받기도 했다. 자유언론에 대한 타협하지 않는 투사였던 그로서는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는 데 언제나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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