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국정원 조사 동의’ 설득을 위해 네번째 방문했던 일본 요코하마 정경모 선생 자택에서. 왼쪽부터 이명준 전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 정 선생과 부인 지요코 여사, 이부영 이사장. 자유언론실천재단 제공
지난 2월 16일 일본 요코하마의 자택에서 별세하신 정경모 선생님 이름 앞에는 일제 식민지시대의 독립지사를 떠올리는 ‘망명객’이라는 호칭이 따라다녔습니다. 반세기를 넘도록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이국땅에서 사셔야 했으니 기막힌 일이었습니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대에는 일본에서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을 벌인 이유로 귀국하지 못하셨다고 해도, 민주화로 들어선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 나아가 촛불혁명으로 이룬 문재인 정부에서도 국가보안법의 족쇄를 풀어주지 못해 끝내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민주정부라해도, 정보기관이나 공안 검찰이 보안법으로 ‘빨갱이 딱지’를 붙여 잡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나라입니다. 보안법 앞에서는 대통령도 별 볼 일 없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그토록 온몸으로 넘어서고, 깨뜨리고자 했던 분단 장벽이 켜켜이 쌓인 조국을 이렇게 남겨 두고 떠나시는 정 선생님의 마음이 오죽하셨겠습니까.
지난 수년동안 문익환 목사님 자제들과 몇몇 후학들이 정 선생님 귀국을 위해 정부 당국과 타협안을 마련해 보려고 애썼지만, “내가 뭘 잘못했다는 말이냐. 갈라진 민족, 나라를 할 걸음이라도 가까이 만들려고 노력한 게 뭐가 죄가 된단 말이냐. 나를 조사하겠다고? 필요 없다. 그럴 거라면 안 간다. 전향? 자술서? 나에게 모욕을 주자는 것이냐? 안 가고 여기서 죽고 묻히겠다.” 선생님은 단호하셨습니다. 결국 선생님은 떠나셨습니다. 못난 정부와 후학들에게 ‘마지막 망명객’의 절절한 묵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동안 해마다 한번씩은 자택을 찾아뵙고 술 한잔 올리던 일도 이젠 영원한 추억이 됐습니다.
정 선생님은 유원호 선생님과 함께 문익환 목사님을 모시고 1989년 3월 25일 평양으로 떠나셨습니다.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쪽 재야민주화운동의 통일방안을 전하고 논의하고 싶다는 문 목사님의 간절한 소망을 실현시키자는 뜻이었지요. 그해 연초에 문 목사님을 만나 먼저 대강의 계획을 전해 들었던 저는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에 대한 탄압에 대응할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남북 정부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문 목사님이 전민련 상임고문 자격으로 남쪽 민간인을 대표한 것이니 한국전쟁 이후 처음 이루어지는 역사적 북행이었습니다. 노태우 정권도 국가연합을 인정하는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하는 등 남북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에, 한편으로 유연한 반응을 기대했지만 역시 그들의 본질은 옛날 그대로였습니다.
그래도 정 선생님 일행이 김 주석에 이어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을 만나 합의하신 ‘4·2 공동성명’은 “1.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기초해 통일문제를 해결 2. 한반도 분열의 지속 반대 3. 정치·군사 회담 추진과 이산가족문제 등 다방면의 교류와 접촉 실현 4. 공존 원칙에 입각한 연방제 방식의 통일 지지에 합의한다”는 큰 성과를 냈습니다. 문 목사님과 유 선생님은 귀국하시자마자 구속됐고 전민련에서는 저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옥고를 치러야했습니다. 무엇보다 정 선생님은 그 뒤 남북회담이 셀 수 없이 열렸지만 끝내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남북관계의 진전과 민간 교류의 확대는 국가보안법이 온존하는한 불가능해 보입니다. 어느 정부가 들어선다해도 우리 안에 뿌리 깊은 극우세력과 외세의 충동질이 있으면, 남북 합의를 뒤집어버리는 만행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김구·여운형·장준하 선생이 하늘에서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시면서 나누는 가상의 대담을 엮은 정 선생님의 책 <찢겨진 산하>를 읽고 우리는 큰 감명을 받았었습니다.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배울 수 없었던 젊은이들에게 해방 전후와 군사독재 치하에서 진정한 지도자의 초상을 바로 세우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문 목사님과 정 선생님 자신이 그 모범을 또 세워주셨습니다.
정 선생님께서 한국전쟁 때 ‘판문점 정전회담’의 미군 쪽 통역관으로 문익환·박형규 목사님과 함께 참관했던 경험이 평생토록 분단극복·민주화·남북화해-평화통일 운동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후학들에게 큰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또한 일본에서 사는 긴 세월 동안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사업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민족적 양심을 가진 이는 어디에 서 있든지 쉬는 법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지난 2월16일 별세한 고 정경모 선생의 빈소. 일본의 장례 풍습에 따라 화장을 한 뒤 평생 거주했던 요코하마 히요시의 자택에 모셨다. 유족 제공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 기류가 거세지는 지금, 미국의 군사주의와 북한의 핵 보유 사태는 한반도에 다시 핵전쟁 위기를 몰고 올 기세입니다. 미국이 일본·호주와 더불어 주도하고 있는 ‘인도-태평양 4자 동맹’(
쿼드)의 주 무대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입니다. 한국이 한미동맹이라는 ‘인계철선’ 때문에 이른바 쿼드동맹에 끌려 들어가지 않을 지혜가 필요합니다. 한미동맹도 줄여가야 하는 처지에, 자유무역과 상호의존이 주류를 이루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이념 대결과 적대적 배제를 앞세우는 강대국 지배 논리에 다시 포로가 된다면 지난 세기처럼 그들의 제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한국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와는 달리, 그리고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 이후와는 달리, 민주화와 산업화 그리고 문화예술과 스포츠의 위상으로 국제적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전인류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대재난에도 한국은 케이(K)방역을 통해 모범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국제적 본보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미·일·중 등 강대국들에 대해서도 중견국으로서 민족적 자존감을 가지고 국가 이익에 근거해서 발언하고 외교력을 발휘해야 할 시점입니다.
정 선생님께서 어떻게든 고국에 돌아와 ‘오래된·새로운’ 지혜를 들려주시기를 기다리고 있던 와중에 홀연 떠나시니 후학들은 어쩔 줄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구·여운형·장준하·문익환·유원호 선생님과 하늘에서 함께 모여 ‘한반도 통일’을 환영하는 감격의 잔치를 벌이시는 날이 어서빨리 오도록 남은 후학들이 노력하겠습니다.
정경모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이부영/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