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씨알연구소 박재순 소장
도산 안창호(1878~1938)와 함석헌(1901~89). 도산은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의 대부였고, 함석헌은 독재에 맞선 민주화의 대부였다. 둘은 열린 크리스찬이란 공통점이 있다. 이런 겉모습뿐 아니라 둘 사이에 깊은 사상의 맥이 닿아 있음을 밝힌 연구서가 나왔다.
서울대 철학과 1학년 때 함석헌을 만나 제자가 된 박재순(71) 씨알연구소 소장 겸 <씨알의 소리> 주필은 그간 함석헌의 사상을 연구하며 세상에 알려왔고, 함석헌의 오산학교 스승인 다석 유영모의 철학사상도 조명했다. 그가 최근 <도산철학과 씨알철학>(동연 펴냄)에서 도산-유영모-함석헌의 사상적 맥을 생명철학으로 정리해 밝혀냈다. 지난달 29일 서울 수유동 북한산 자락의 자택으로 박 소장을 찾아갔다.
4살때 소아마비·9살때 부친 여의고
서울대 1학년때 함석헌 만나 제자로
유신 반대·신군부 비판해 두차례 옥고
“육체나 물질 넘어선 자기 생명 체험” 최근 ‘도산철학과 씨알철학’ 펴내
“개개인 역사 주체로 삼은 ‘나’ 발견” 박 소장은 이곳에서 부인 박경미(이화여대 신학대학원장) 교수와 함께 100살 넘은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다. 외동딸은 취직해 한달 전 분가했다. 집안엔 온갖 생명들로 넘쳐나고 있다. 마당뿐 아니라 실내에도 나무들이 산소를 내뿜고 고양이 대여섯마리가 놀고 있다. 부부가 북한산의 굶주리는 들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주다보니 ‘냥이 천국’이 됐다.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한 박 소장은 박정희 유신독재 때 민청학련 사건으로 5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1980년 전두환 신군부를 비판한 ‘한울회 사건’으로 2년 반 넘게 옥고를 치렀다. 인동초 같은 생명력으로 버텨온 그가 도산철학과 씨알철학의 맥을 파고든 계기는 무엇일까. “함석헌과 유영모를 연구하면서 든 가장 큰 의문은 어떻게 해서 그들은 ‘나’를 중심과 전문에 내세우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어떤 철학과 종교 사상의 전통에서도, 어떤 철학가와 도덕가에게서도 유영모와 함석헌처럼 ‘나’를 앞세우는 사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유교는 극기와 수기로 나를 누르고 닦으려 했고, 도교는 무위자연을 내세우며 나를 자연의 법도와 질서에 순응하게 했고, 불교는 무아로 나를 초월하라 했다.” 박 소장은 “도산 사상을 연구하면서 그런 의문이 깨끗이 풀렸다”고 한다. 도산은 나라를 잃고 종살이 하는 한민족 한사람 한사람의 ‘나’를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깨워 일으켜 독립과 통일 운동에 앞장서게 한 ‘나’ 철학자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영모와 함석헌의 씨알철학을 깊이 이해하고 완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산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함석헌이 도산을 몇번 만나긴 했지만 직접 깊은 대화를 나누진 못한 듯하다. 그러나 기업으로 큰 성공을 했던 남강 이승훈이 1907년 평양에서 14살 연하인 도산의 연설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아 전 재산을 털어 오산학교를 설립했고, 그곳에서 유영모, 조만식이 가르치고 함석헌이 배워 간적접으로 도산을 계승했다.”
함석헌은 서울 원효로에 있던 집을 팔아 남강재단에 기증할 만큼 남강을 절대적으로 존경했다. 그렇게 ‘나’를 역사의 주체로 세우는 도산의 ‘나’ 철학이 남강을 거쳐 유영모와 함석헌의 씨알철학으로 계승·발전되었다는 것이다. 도산의 ‘나’ 철학은 나를 사랑하듯 타인도 사랑하라는 애기애타(愛己愛他) 정신으로 표현됐고, 그것이 방탄소년단의 <러브 마이셀프>, <러브 유어셀프>로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고 그는 보고 있다.
“도산은 어려서는 조·부와 서당 훈장으로부터 한문과 유학을 배우고, 17살 때 서울에서 구세학당에 다니며 기독교와 과학과 신문명, 민주주의를 배워 동서 정신문화를 융합해 ‘나’ 철학을 확립했다. 그런 도산의 사상은 고대 노예제·봉건사회의 시대적 제약에 갇혀 있는 공자·소크라테스·플라톤의 사상을 훨씬 능가하며 이성주의와 과학주의의 포로가 된 서양 근현대 정신세계보다 훨씬 깊고 풍부하다.”
민족과 개인의 수난과 고난 속에서 체험적으로 피워낸 도산과 함석헌의 철학을 박 소장은 ‘생명철학’으로 정의한다. 그는 4살 때 소아마비에 걸리고, 마치 어른처럼 대해주던 아버지를 9살에 잃고, 중학교 때 병약해 30살을 넘기지 못할 것 같은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을 지탱해준 ‘생명’을 온몸으로 느껴왔기에 생명철학에 더 천착하게 되었다고 했다. “육체나 물질을 넘어선 자기 생명을 체험한 사람은 사나 죽으나 흔들림이 없다.”
일제 말기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친일로 돌아선 때에도 도산이 절대희망, 절대낙관을 잃지 말라고 독려하고, 함석헌이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 직후후 광주에서 절대승리, 절대희망을 주제로 강연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체험적 생명철학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 소장은 미상으로 남아있던 애국가 작사자가 도산이라는 증거들을 종합해 지난해 <애국가 작사자 도산 안창호>란 책도 냈다.
“도산이 애국을 깨우는 웅변을 토할 때면 그를 감시하던 일제 순사가 받아적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쏟을 정도로, 적까지 감동시켰고, 흥사단 등의 조직가로서도 탁월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주위에 아픈 사람을 온 정성으로 밤새 간호한 사랑의 실천자였고, 인격자였고, 수양이 된 성현이면서 100년 전에 이미 삼천리 방방곡곡 모든 마을에 도서관과 체육시설이 있는 마을공화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21세기적 대안’을 제시한 인물이었다. 이승만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도산을 시기 질투해 미워했지만, 박정희는 도산을 가장 존경했고, 김일성도 대통령을 뽑는다면 도산이라고 회고록에 쓸 정도였다.”
박 소장은 “각자가 저답게 살며 주체적으로 민주공화정을 이루는 도산과 씨알의 생명철학으로 세계 정의와 평화라는 새 문명의 패러다임을 열어갈 것”을 제안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박재순 씨알연구소 소장이 지난달 29일 서울 수유리 자택에서 먹이를 찾아온 북한산의 들고양이를 껴안고 있다. 조현 기자
서울대 1학년때 함석헌 만나 제자로
유신 반대·신군부 비판해 두차례 옥고
“육체나 물질 넘어선 자기 생명 체험” 최근 ‘도산철학과 씨알철학’ 펴내
“개개인 역사 주체로 삼은 ‘나’ 발견” 박 소장은 이곳에서 부인 박경미(이화여대 신학대학원장) 교수와 함께 100살 넘은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다. 외동딸은 취직해 한달 전 분가했다. 집안엔 온갖 생명들로 넘쳐나고 있다. 마당뿐 아니라 실내에도 나무들이 산소를 내뿜고 고양이 대여섯마리가 놀고 있다. 부부가 북한산의 굶주리는 들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주다보니 ‘냥이 천국’이 됐다.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한 박 소장은 박정희 유신독재 때 민청학련 사건으로 5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1980년 전두환 신군부를 비판한 ‘한울회 사건’으로 2년 반 넘게 옥고를 치렀다. 인동초 같은 생명력으로 버텨온 그가 도산철학과 씨알철학의 맥을 파고든 계기는 무엇일까. “함석헌과 유영모를 연구하면서 든 가장 큰 의문은 어떻게 해서 그들은 ‘나’를 중심과 전문에 내세우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어떤 철학과 종교 사상의 전통에서도, 어떤 철학가와 도덕가에게서도 유영모와 함석헌처럼 ‘나’를 앞세우는 사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유교는 극기와 수기로 나를 누르고 닦으려 했고, 도교는 무위자연을 내세우며 나를 자연의 법도와 질서에 순응하게 했고, 불교는 무아로 나를 초월하라 했다.” 박 소장은 “도산 사상을 연구하면서 그런 의문이 깨끗이 풀렸다”고 한다. 도산은 나라를 잃고 종살이 하는 한민족 한사람 한사람의 ‘나’를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깨워 일으켜 독립과 통일 운동에 앞장서게 한 ‘나’ 철학자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영모와 함석헌의 씨알철학을 깊이 이해하고 완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산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함석헌이 도산을 몇번 만나긴 했지만 직접 깊은 대화를 나누진 못한 듯하다. 그러나 기업으로 큰 성공을 했던 남강 이승훈이 1907년 평양에서 14살 연하인 도산의 연설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아 전 재산을 털어 오산학교를 설립했고, 그곳에서 유영모, 조만식이 가르치고 함석헌이 배워 간적접으로 도산을 계승했다.”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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