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이다. 또 다시 새롭게 시작한 한 주간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월요일이 되면 밀려오는 고민이 있다. 출근길이 막히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고, 휴일로 인한 후유증 에 대한 것도 아니다. 내 앞에 놓여진 일주일이라는 이 벅찬 세상을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에 대한 막막함과 두려움에 대한 고민이다. 또 다시 주어진 일주일의 신성한 시간들과 엄숙한 삶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월요일 아침이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하는 구도자적 질문이 끊임없이 밀려온다.
언제부턴가 삶의 신성하고 거룩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월요일 구도자 증후군(나 스스로 만든 명칭임)이 반복되었다. 새로운 시간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거룩한 예배당이나 사원 앞에 선 느낌으로 신성함을 받아들이고, 그 거룩한 경지로 들어가기 위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내면의 의식 같은 것이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그건 신성한 삶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마음을 다잡는 나만의 성스러운 의식 같은 것이다.
이 의식의 핵심은 새로운 한 주간의 내 삶을 이끌어줄 어떤 거룩한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삶을 함부로 살지 못하도록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어떤 말씀(로고스)을 찾는 것이다. 교만과 아집, 탐욕으로 가득 찬 나의 육체의 소욕이 내 삶 속에서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제어할 정신적 힘을 찾는 것이다. 거룩한 영혼(soul)의 힘으로 육체를 제어하지 못하면 신성한 시간 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결국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없기에 영혼에 힘을 주는 도(진리)를 구하는 구도자의 의식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구도자의 모습으로 월요일 증후군을 치료받는 나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매우 많다. 그 중에서도 오늘의 영감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에게서부터 왔다. <월든>과 <시민불복종> 등을 통해서 이미 여러 차례 내게 거룩한 정신을 심어준 소로우는 오늘도 <구도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또 다른 영감으로 영혼의 힘을 주었다. 사실 이 편지들이 모두 그의 친구이자 신학자였던 블레이크에게 보내는 편지라서 그런지 내게는 더욱 더 깊은 영감으로 다가온다. 나 역시 20년 이상 신학을 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부는 무한하다. 왜냐하면 나의 재산은 소유가 아니라 향유이기 때문이다.”(소로우가 블레이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소로우의 당당함이 느껴지는 표현이다. 무엇에 당당하다는 말인가? 물질주의적 세상 앞에 당당하다는 말이다. 부와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향유, 즉 주어진 현실에 대한 만족에 있다는 저 당당한 삶과 철학 앞에 어찌 세상이 위세를 떨 수 있을까? 육체의 욕망으로 넘쳐나는 세상은 소로우의 당당함 앞에 늘 무릎을 꿇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 정도 당당한 삶의 철학이라면 능히 한 주일, 아니 한 평생을 거룩한 영혼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 틀림없다.
사실 소로우의 저 당당한 철학은 그 자신 만의 것이 아니다. 에리히 프롬과 또 나에게 소유와 존재의 이분법적 현상 속에서 소유가 아닌 존재의 가치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 준 소로우였지만, 그 역시 무소유의 삶의 가치만큼은 세상 역사를 살아 온 수많은 정신적 스승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소로우에게 그 정신적 힘을 제공해 준 구도자들은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있고, 중세의 신비주의 영성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있다. 저들의 이름에 “세인트,” “마이스터”란 명칭이 붙어 있는 것만 봐도 저들의 영성과 깨달음의 경지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다. 프란체스코나 에크하르트의 정신 역시 그들 고유의 것만이 아니다. 그 정신은 그 이전에 성 안토니우스나 파코미우스 같은 수도사들의 깨달음에서 왔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의 구도의 길을 가르쳐 준 진정한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가?
예수로부터 소로우에게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 에리히 프롬의 정신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가르침은 영혼의 힘이 소유양식의 삶이 아닌 존재양식의 삶에서 온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신성한 시간 속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진리를 찾는 사람들의 영혼에 힘을 주는 참된 정신이라는 것을 선각자들은 말해주고 있다.
소로우는 진정한 부자로 살았던 사람이었다. 마음속에서 육체의 욕심을 버리고, 자연을 경멸하지 않으며, 온갖 편견과 차별을 물리쳤던 사람! 그래서 그는 부자요 행복자로 살았던 것이다. 이 편지를 받고 블레이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나처럼 새로운 영혼의 힘을 얻고 구도자의 길을 한 걸음 더 내딛지 않았을까?
150년 전의 한 편지가 오늘 내 영혼에게도 배달됨으로, 나는 이제 월요일의 고민을 떨쳐내고 일주일을 살 수 있는 영혼의 힘을 얻었다. 소로우의 깨달음처럼 내 마음의 욕심을 제거하고 순수하게 삶과 존재 그 자체를 향유하면서 살아간다면 신성한 시간에 걸 맞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태가 쓴 복음 5장 3절)
예수가 가르쳐 준 이 위대한 진리는 2천 년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구도자들에게 세상을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진정한 영감이 되었던 것이다. 소유욕에 이끌리지 않는 가난한 마음을 품을 수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절대로 경망스러워지지 않을 것이다. 실체를 알 수 없는 투쟁과 대립, 갈등과 분쟁으로부터 신성한 삶의 의미로 돌아설 수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이 가난해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육체의 욕망에 의한 대립과 분쟁이 점점 더 심화된다면, 그 분쟁을 잠재우기 위한 해법을 스스로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해야겠기에 우린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또 다시 주어진 일주일이라는 이 신성한 시간, 그리고 그 속에서의 거룩한 삶!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주어질 축복일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한 주일의 삶이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에 월요일 증후군을 치료할 나의 깨달음이다.
| 한겨레 필진네트워크 나의 글이 세상을 품는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