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종교

김규식 여운형과 좌우합작 주도하기도

등록 2006-08-17 13:54

강원용 목사의 사회 참여
일제강점과 광복 그리고 한국전쟁, 민주화운동 등 한국현대사에서 굵직한 사건들을 직접 겪은 강원용 목사는 해방 이후 줄곧 정치와 통일, 언론 등 사회문제에 대해 적극 목소리를 냈다.

이는 고인이 우선적인 가치로 삼았던 '너희가 먼저 그들 나라와 의(義)를 구하라'라는 성경의 구절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1945년 해방을 맞은 뒤 김규식, 여운형 등과 만남을 통해 청년대표로 좌우합작운동에 뛰어면서 건국운동에 참여했으며, 이승만 정권 시절엔 기독교청년단체 간부로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미국에서 유학하다 1960년대 초반 귀국한 고인은 1970년대 들어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선생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1974년엔 악법철폐, 인권회복 등을 목표로 창립된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을 맡기도 했다.

2000년 10월에는 남북간의 평화정책을 위해 범국민적, 초당적 협력을 위한 대화모임인 사단법인 '평화포럼'을 발족했다.

종교계를 비롯해 학계, 문화예술계, 정계, 시민운동단체 등 각계의 인사가 한 자리에 모여 통일의 방향과 경로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자리였다.

고인은 '나는 정치가도 사회운동가도 성직자도 아닌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라는 소신 대로 현실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1988년 국무총리직을 제의받은 것을 비롯해 정치권으로부터 은밀한 제의가 많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하지만 좌와 우, 보수와 진보 등 이분법적 사고가 득세하는 사회 풍토 속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해온 고인의 여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고인은 방송 민주화에도 앞장서왔다. 1961-1967년 방송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1988년엔 방송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또 김대중 정부 시절엔 대통령 직속 방송개혁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방송은 정치매체가 아닌 문화매체이며, 방송의 정치적 독립이 필요하다"는 것이 오랜 기간 방송 개혁에 앞장섰던 고인의 신념이었다.

이봉석 기자 anfour@yna.co.kr (서울=연합뉴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