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도올 선생님! 선생님의 <요한복음 강해>를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번 강좌에 앞서 요단을 건너는 심정이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의 의미를 잘 읽을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사상들을 통해서 세계를 구원할 보편적 진리의 틀을 제공하고자 하시는 선생님의 학문적 활동은 기독교 신학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채찍이 되고 있습니다. 강의와 저술들을 통해서 선생님께서 지적하고 계시는 많은 기독교 현상학적 오류들은 늘 제 가슴을 아프게 했던 요소들이었기에 더욱 더 큰 찔림이 있었습니다. 그건 마치 자크 엘룰의 날카로운 지적을 읽을 때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선생님의 그 충성된 지적을 겸허하게 수용하여 인류를 구원할 진정한 종교로서 새롭게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신학자로서 부담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선생님께 메일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강해>라는 선생님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 텍스트 속에 들어있는 선생님의 사상이 정말로 기독교사상을 보편적 진리의 틀로 제시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의 학문적 지평은 참으로 방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의 진리 체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단지 기독교사상에 국한되지 않고 동서양의 철학과의 지평융합을 이루시는 포괄성이 있습니다. 그러한 방법은 분명 기독교 진리를 보편적 진리로 승화시키는 지성적 방법론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기독교 신학에 대한 선생님의 이해는 다소 부분적이며 포괄적이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책에서 말씀하신대로 지면의 한계로 인해 한정적 논리 전개를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것보다는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사상적 기회(嗜好)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선생님의 <요한복음 강해>를 읽으면서 몇 가지 주제들과 관련된 신학적인 토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되었습니다. 그 주제들로는 (1) 성경과 성경 해석에 대한 이해, (2) 로고스 기독론과 보혜사 성령의 이해에 나타난 삼위일체 문제, (3) 역사적 예수 논쟁, (4)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이해, (5) 기독교 실재론에 대한 이해와 같은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주제들은 19세기 이후로 기독교 내에서 수많은 학문적 논쟁이 이루어졌던 신학사적 논쟁의 주제들임을 선생님도 잘 알 것입니다. 그것은 이러한 주제들이 가지는 쟁점이 그만큼 치열하며 많은 이론적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제들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는 매우 단순하며 선언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서해석학에 있어서는 불트만적(역사비평, 양식비평)이며,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는 플로티누스적(신플라톤주의)이며,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는 케제만적이며, 종말론에 있어서는 C. H. 도드와 불트만적(내재적이고 현재적이며 실현된 종말론)입니다. 물론 저의 이 단순한 설명에 동의하지 않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읽어본 선생님의 텍스트는 이런 사상들과 연결되어져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문제는 이런 사상들만이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론들은 모두 기독교 신학에 등장했던 여러 사상들 중의 하나일 뿐이며, 그 자체로 많은 신학적 도전을 받았던 이론들일 뿐이며, 기독교 신학의 발전과 더불어 새로운 이론들로 계속 대치되고 있는 이론들이라는 사실을 21세기 기독교 신학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즉 선생님께서 제시하고 계시는 사상들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보편적 지평융합을 이룰 수 있는 기독교의 사상이라기보다는 기독교 사상사에서 등장한 어느 한 이론으로서 그 자체로 많은 이론적 논의가 필요한 사상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선생님이 가르치는 사상들은 기독교 신학적 논의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지 선생님께서 인식하고 계시는 것처럼 기독교를 구원할 새로운 이론적 틀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잘 알듯이 독자들이나 시청자들은 전문적이고 지적인 소양이 부족하기 때문에 연역적으로 단순화시킨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 그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 속성을 간파하고 그렇게 단순화시키신 것이라면 선생님의 강의는 단지 포퓰리즘적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아니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사상적 담론과 검증을 거칠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메일을 통해서 선생님이 단순화시켰던 주제 하나를 가지고 선생님과 토론함으로써 선생님의 논리적 결론이 수정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 하나의 주제는 바로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이해입니다.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도올 선생님의 이해 <요한복음 강해>를 통해서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기독교 종말론은 내재적이고 현재적이며 실현된 종말론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종말론적 사상은 선생님의 책 <요한복음 강해> 전체에 걸쳐서 포괄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어떤 한 구절을 인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종말론적 사건이 현재화되어 있다거나, 마지막 날의 사건은 지금 여기에서의 영생의 재확인이 불과하다거나,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의 심령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로 설명함으로써 내재적이며 현재적인 종말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선생님께서 실현된 종말론을 아울러 말씀하셨는지는 신학적으로 미묘한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C. H. 도드의 사상에 동의하시는 선생님의 해석적 특성으로 볼 때 그것도 함께 아우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도드의 실현된 종말론이란 종말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특별히 요한복음의 기별에서 그런 사상이 풍성하게 나타남) ‘이미’(already) 실현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종말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종말론 폐기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현재적 종말론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선생님의 현재적 종말론은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해석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도드의 사유를 이미 넘어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적 종말론은 실현된 종말론의 사상적 확대로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가 다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종말론은 내재적이고 현재적이며 실현된 종말론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설명하신 이 현재적 종말론은 몇 가지 전제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전제는 묵시론(apocalyptism)과 종말론(eschatology)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묵시론을 배격하고 종말론을 강조하는 것(p. 137-139)이며,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묵시론적 종말론적 요소들을 단순화시키는 것(p. 264)이며, 세 번째는 보혜사 성령을 예수의 파루시아(parousia)의 현현으로 해석하는 것(p. 389) 등입니다. 이런 전제들은 현재적 종말론을 설명하고자 하는 선생님의 이론적 장치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장치들만으로 기독교 종말론을 현재적 종말론으로 단정하기에는 신학적 한계가 너무 큽니다. 이제 그 이유에 대해서 선생님의 전제들에 대한 신학적 비평을 토대로 설명하겠습니다. 기독교 종말론의 이해 선생님께서는 하나의 표를 통해서 세례 요한의 종말론은 묵시론적이었고, 예수의 종말론은 종말론적이었다고 비교하고 있습니다(p. 139). 성경예서 계시된 예수의 파루시아(parousia, 재림)에 대한 기대감은 묵시론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재림이 지연되자 기독교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현재적이고 복천년적인 기대감으로 신학을 수정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플로라의 요아킴, 루터, 슐라이에르마허, 리츨 등 기독교 시대를 아우르는 신학자들은 모두 이런 사상의 발전에 신학적 공헌을 남긴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19세기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의 발전과 더불어 내재적이고 윤리적인 종말론이 기독교사상을 이끌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계몽주의적 낙관주의에 입각한 사회적 유토피아의 사상과 맞물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주의 신학의 제자들인 바이스와 슈바이처에 의해서 기독교의 종말론은 철저하게 묵시론적이었다는 사실이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슈바이처는 이 이론에 지나쳐 결국 기독교 종말론은 실패했다고 설명하기에 이르렀지만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가 묵시론적 종말론의 궁극적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슈바이처의 이론은 곧 도드의 실현된 종말론과 같은 이론에 자리를 내주었고, 그로부터 바르트와 불트만에 이르는 실존주의적 종말론이 기독교 신학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현재적 종말론은 지금 여기에서의 결단의 시점이 바로 종말이라는 실존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함으로써 역사 속에서 약속과 기대와 희망의 지평으로 제시된 기독교 종말론의 역사성을 배제해버리고 마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런 신학적인 반성과 더불어 기독교 종말론은 약속과 기대와 희망의 지평에서 미래의 묵시론적 종말론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20세기 중반에 등장한 몰트만과 판넨베르크의 희망의 신학인 것입니다. 몰트만은 기독교 종말론이 철저하게 미래로부터 도래하는 것이며, 그 미래는 약속과 기대의 지평에서 다가오는 역사적이고 시간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판넨베르크 역시 미래는 막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보편사에서 그것은 결코 막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하였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이 보편사에 나타난 하나의 초월적 계시이기 때문에 재림 또한 초월적이지만 분명히 역사로서 이루어질 계시임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 판넨베르크의 통찰력입니다. 이처럼 몰트만과 판넨베르크는 미래에 임할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와 하나님의 나라가 기독교가 지향하는 궁극적 희망이기 때문에 이런 종말론이라야 희망의 신학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희망의 신학자들은 어느 점에서 묵시론적 종말론의 요소를 다시 신학적으로 부각시킨 것입니다. 이 현대신학사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기독교 종말론이 묵시론적 종말론과 종말론적 종말론이 철저한 변증법적 긴장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스텐리 그랜츠와 로저 올슨이 <20세기 신학>에서 밝힌 것처럼 기독교 신학은 초월성과 내재성의 이중적 진리가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긴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 종말론은 묵시론과 종말론의 긴장관계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스카르 쿨만과 같은 구원사 신학자들은 기독교 종말론을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니’(not yet) 사이의 이중적 구조로 이해해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영국의 학자 C. H. 도드를 위대한 신약학자로 소개하고 계시는데, 그에 걸맞는 학자인 G. E. 래드는 신학적으로 이런 이중적 종말론의 종합을 이루어내지 않았습니까? 현재 기독교 신학계에서 종말론에 관한한 쿨만과 큄멜과 노먼 페린과 죠지 래드와 스티븐 트래비스 등과 같은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선생님께서는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요한복음 강해>를 통해서 선생님께서 현재적 종말론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은 어느 점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는 현재적 종말론적 자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적 종말론을 강조한 학자들(C. H. 도드, J. A. T. 로빈슨, T. F. 글래슨, 루돌프 오토, 루돌프 불트만)이 요한복음의 내용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묵시론적 자료들은 전혀 없습니까? 또한 다른 복음서들은 어떻습니까? 마태나 누가는 묵시론적 종말론에 대한 요소들을 역시 많이 다루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중적 종말론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기독교 신학적 당위가 나타난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요한복음에도 종종 등장하는 묵시론적 종말론 텍스트들를 요한의 문학적 풍요로움으로만 처리함으로써 현재적 종말론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p. 264).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기독교 종말론의 이중적 긴장의 요소를 배격하고 어느 한쪽의 견해만으로 해석하고자 하시는 선생님의 해석학적 기호(嗜好) 때문에 나타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이해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묵시론적 종말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기독교 종말론이 견지하고 있는 묵시론은 후기 유대 묵시문학서에 나타나고 있는 카타스트로피적 묵시론과는 다릅니다. 선생님도 지적하셨듯이 세례 요한의 묵시론과 예수의 종말론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는 현재적 종말론적 요소와 유대 묵시론을 종합하셨습니다. 그 두 사상의 통합을 통해 기독교 종말론을 창출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종말론에는 예수에 의해서 재해석된 묵시론적 개념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케제만의 종말론을 비평한 에벨링과 훅스의 해석학적 이해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의 묵시론은 후기 유다문학적 묵시론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미래에 도래할 파루시아를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의 비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몰트만이 강조한 요소인 것입니다. 기독교 종말론은 지금 여기에서 예수를 믿는 결단에 의해 현재적으로 이루어지는 마음의 회심과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현재적 종말론의 요소를 강조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으로 하는 기독교 종말론이 견지해야 할 한 이론적 틀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현대신학에 나타난 기독교 종말론이 이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은 저도 100%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서 기독교 종말론은 현재를 넘어서 초월적이고 보편사적인 측면에서의 미래 희망적 요소 역시 간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종말론이 바로 죽음과 부활, 나아가 불멸(immortality)에 대한 이해와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트레비스가 통찰했듯이 기독교 종말론은 죽음과 사후의 삶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물론 선생님께서는 사후의 삶에 대한 기독교의 소망을 “이해될 수 없고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한 불트만에 견해에 동의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죽음과 부활, 불멸에 대한 풍성한 계시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십분 양보해서 그러한 내용들이 포함된 구절들을 비신화화(혹은 실존적 해석)시킨다 해도 그것들과 종말론의 관계를 배제시킬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종말론은 ‘지금 여기’라는 현재적 의미와 더불어 ‘미래’라는 목표와 희망으로서의 의미를 함께 가지고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도올 선생님! 기독교 종말론은 기독교의 궁극적 목적이요 희망에 관한 이론입니다. 미래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와 그로 인해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는 기독교의 궁극적 희망입니다. 그 궁극적 희망으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기독교의 선교사명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희망의 신학으로서 기독교 종말론이 가지고 있는 미래 희망적 요소를 배제한다면 기독교가 어떻게 인류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현재적 종말론은 인류를 구원할 보편적 진리의 틀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실존주의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완전한 철학적 체계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3차원의 시공 속에서 존재의 한계에 부딪혀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들에게 기독교의 종말론을 단지 현재적인 의미로만 국한시킨다면 그것이 저들에게 무슨 희망이 되며, 구원의 진리가 되겠습니까? 죽음은 불가항력적이며, 초월적인 경험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경험 너머까지를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를 넘어서 초월의 영역으로부터 이르러 오는 것이 종교적 진리이지 않을까요? 기독교 종말론은 본질적으로 그런 진리 체계로 구성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파루시아를 강조하신 것이며, 교회는 그 파루시아를 기다리며 오늘도 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종말론은 그런 점에서 인류를 구원할 보편적 진리의 메시지로 제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단지 현재적으로만 제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 기독교 사상사에서 내재적이고 초월적인 신학의 변증법이, 묵시론적이고 종말론적인 종말론의 변증법이,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종말론의 변증법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지, 그 당위에 대해서 헤아리시어 부디 이 땅에서 기독교사상을 보편적 진리의 틀로 제시하시고자 하시는 선생님의 뜻이 더 합리적으로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글을 줄이면서 선생님이나 저나 한정된 시간과 지면으로 인해 소통의 어려움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지라도 그 한계를 넘어선 대화가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저의 견해에 대한 선생님의 입장을 확인한 후 대화를 계속 요청 드리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기자 간담회에서 기독교계에 공개토론을 요청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 신학을 전공(교회사)한 한 사람으로서 그 진지한 요구에 부담을 느껴 이렇게 메일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대화를 통해서 기독교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선생님과 저의 뜻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2007년 2월 28일
서초동 연구실에서
이국헌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도올 선생님의 이해 <요한복음 강해>를 통해서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기독교 종말론은 내재적이고 현재적이며 실현된 종말론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종말론적 사상은 선생님의 책 <요한복음 강해> 전체에 걸쳐서 포괄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어떤 한 구절을 인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종말론적 사건이 현재화되어 있다거나, 마지막 날의 사건은 지금 여기에서의 영생의 재확인이 불과하다거나,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의 심령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로 설명함으로써 내재적이며 현재적인 종말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선생님께서 실현된 종말론을 아울러 말씀하셨는지는 신학적으로 미묘한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C. H. 도드의 사상에 동의하시는 선생님의 해석적 특성으로 볼 때 그것도 함께 아우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도드의 실현된 종말론이란 종말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특별히 요한복음의 기별에서 그런 사상이 풍성하게 나타남) ‘이미’(already) 실현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종말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종말론 폐기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현재적 종말론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선생님의 현재적 종말론은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해석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도드의 사유를 이미 넘어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적 종말론은 실현된 종말론의 사상적 확대로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가 다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종말론은 내재적이고 현재적이며 실현된 종말론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설명하신 이 현재적 종말론은 몇 가지 전제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전제는 묵시론(apocalyptism)과 종말론(eschatology)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묵시론을 배격하고 종말론을 강조하는 것(p. 137-139)이며,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묵시론적 종말론적 요소들을 단순화시키는 것(p. 264)이며, 세 번째는 보혜사 성령을 예수의 파루시아(parousia)의 현현으로 해석하는 것(p. 389) 등입니다. 이런 전제들은 현재적 종말론을 설명하고자 하는 선생님의 이론적 장치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장치들만으로 기독교 종말론을 현재적 종말론으로 단정하기에는 신학적 한계가 너무 큽니다. 이제 그 이유에 대해서 선생님의 전제들에 대한 신학적 비평을 토대로 설명하겠습니다. 기독교 종말론의 이해 선생님께서는 하나의 표를 통해서 세례 요한의 종말론은 묵시론적이었고, 예수의 종말론은 종말론적이었다고 비교하고 있습니다(p. 139). 성경예서 계시된 예수의 파루시아(parousia, 재림)에 대한 기대감은 묵시론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재림이 지연되자 기독교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현재적이고 복천년적인 기대감으로 신학을 수정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플로라의 요아킴, 루터, 슐라이에르마허, 리츨 등 기독교 시대를 아우르는 신학자들은 모두 이런 사상의 발전에 신학적 공헌을 남긴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19세기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의 발전과 더불어 내재적이고 윤리적인 종말론이 기독교사상을 이끌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계몽주의적 낙관주의에 입각한 사회적 유토피아의 사상과 맞물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주의 신학의 제자들인 바이스와 슈바이처에 의해서 기독교의 종말론은 철저하게 묵시론적이었다는 사실이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슈바이처는 이 이론에 지나쳐 결국 기독교 종말론은 실패했다고 설명하기에 이르렀지만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가 묵시론적 종말론의 궁극적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슈바이처의 이론은 곧 도드의 실현된 종말론과 같은 이론에 자리를 내주었고, 그로부터 바르트와 불트만에 이르는 실존주의적 종말론이 기독교 신학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현재적 종말론은 지금 여기에서의 결단의 시점이 바로 종말이라는 실존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함으로써 역사 속에서 약속과 기대와 희망의 지평으로 제시된 기독교 종말론의 역사성을 배제해버리고 마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런 신학적인 반성과 더불어 기독교 종말론은 약속과 기대와 희망의 지평에서 미래의 묵시론적 종말론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20세기 중반에 등장한 몰트만과 판넨베르크의 희망의 신학인 것입니다. 몰트만은 기독교 종말론이 철저하게 미래로부터 도래하는 것이며, 그 미래는 약속과 기대의 지평에서 다가오는 역사적이고 시간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판넨베르크 역시 미래는 막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보편사에서 그것은 결코 막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하였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이 보편사에 나타난 하나의 초월적 계시이기 때문에 재림 또한 초월적이지만 분명히 역사로서 이루어질 계시임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 판넨베르크의 통찰력입니다. 이처럼 몰트만과 판넨베르크는 미래에 임할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와 하나님의 나라가 기독교가 지향하는 궁극적 희망이기 때문에 이런 종말론이라야 희망의 신학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희망의 신학자들은 어느 점에서 묵시론적 종말론의 요소를 다시 신학적으로 부각시킨 것입니다. 이 현대신학사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기독교 종말론이 묵시론적 종말론과 종말론적 종말론이 철저한 변증법적 긴장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스텐리 그랜츠와 로저 올슨이 <20세기 신학>에서 밝힌 것처럼 기독교 신학은 초월성과 내재성의 이중적 진리가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긴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 종말론은 묵시론과 종말론의 긴장관계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스카르 쿨만과 같은 구원사 신학자들은 기독교 종말론을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니’(not yet) 사이의 이중적 구조로 이해해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영국의 학자 C. H. 도드를 위대한 신약학자로 소개하고 계시는데, 그에 걸맞는 학자인 G. E. 래드는 신학적으로 이런 이중적 종말론의 종합을 이루어내지 않았습니까? 현재 기독교 신학계에서 종말론에 관한한 쿨만과 큄멜과 노먼 페린과 죠지 래드와 스티븐 트래비스 등과 같은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선생님께서는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요한복음 강해>를 통해서 선생님께서 현재적 종말론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은 어느 점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는 현재적 종말론적 자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적 종말론을 강조한 학자들(C. H. 도드, J. A. T. 로빈슨, T. F. 글래슨, 루돌프 오토, 루돌프 불트만)이 요한복음의 내용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묵시론적 자료들은 전혀 없습니까? 또한 다른 복음서들은 어떻습니까? 마태나 누가는 묵시론적 종말론에 대한 요소들을 역시 많이 다루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중적 종말론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기독교 신학적 당위가 나타난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요한복음에도 종종 등장하는 묵시론적 종말론 텍스트들를 요한의 문학적 풍요로움으로만 처리함으로써 현재적 종말론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p. 264).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기독교 종말론의 이중적 긴장의 요소를 배격하고 어느 한쪽의 견해만으로 해석하고자 하시는 선생님의 해석학적 기호(嗜好) 때문에 나타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이해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묵시론적 종말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기독교 종말론이 견지하고 있는 묵시론은 후기 유대 묵시문학서에 나타나고 있는 카타스트로피적 묵시론과는 다릅니다. 선생님도 지적하셨듯이 세례 요한의 묵시론과 예수의 종말론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는 현재적 종말론적 요소와 유대 묵시론을 종합하셨습니다. 그 두 사상의 통합을 통해 기독교 종말론을 창출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종말론에는 예수에 의해서 재해석된 묵시론적 개념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케제만의 종말론을 비평한 에벨링과 훅스의 해석학적 이해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의 묵시론은 후기 유다문학적 묵시론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미래에 도래할 파루시아를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의 비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몰트만이 강조한 요소인 것입니다. 기독교 종말론은 지금 여기에서 예수를 믿는 결단에 의해 현재적으로 이루어지는 마음의 회심과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현재적 종말론의 요소를 강조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으로 하는 기독교 종말론이 견지해야 할 한 이론적 틀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현대신학에 나타난 기독교 종말론이 이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은 저도 100%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서 기독교 종말론은 현재를 넘어서 초월적이고 보편사적인 측면에서의 미래 희망적 요소 역시 간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종말론이 바로 죽음과 부활, 나아가 불멸(immortality)에 대한 이해와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트레비스가 통찰했듯이 기독교 종말론은 죽음과 사후의 삶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물론 선생님께서는 사후의 삶에 대한 기독교의 소망을 “이해될 수 없고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한 불트만에 견해에 동의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죽음과 부활, 불멸에 대한 풍성한 계시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십분 양보해서 그러한 내용들이 포함된 구절들을 비신화화(혹은 실존적 해석)시킨다 해도 그것들과 종말론의 관계를 배제시킬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종말론은 ‘지금 여기’라는 현재적 의미와 더불어 ‘미래’라는 목표와 희망으로서의 의미를 함께 가지고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도올 선생님! 기독교 종말론은 기독교의 궁극적 목적이요 희망에 관한 이론입니다. 미래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와 그로 인해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는 기독교의 궁극적 희망입니다. 그 궁극적 희망으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기독교의 선교사명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희망의 신학으로서 기독교 종말론이 가지고 있는 미래 희망적 요소를 배제한다면 기독교가 어떻게 인류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현재적 종말론은 인류를 구원할 보편적 진리의 틀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실존주의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완전한 철학적 체계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3차원의 시공 속에서 존재의 한계에 부딪혀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들에게 기독교의 종말론을 단지 현재적인 의미로만 국한시킨다면 그것이 저들에게 무슨 희망이 되며, 구원의 진리가 되겠습니까? 죽음은 불가항력적이며, 초월적인 경험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경험 너머까지를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를 넘어서 초월의 영역으로부터 이르러 오는 것이 종교적 진리이지 않을까요? 기독교 종말론은 본질적으로 그런 진리 체계로 구성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파루시아를 강조하신 것이며, 교회는 그 파루시아를 기다리며 오늘도 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종말론은 그런 점에서 인류를 구원할 보편적 진리의 메시지로 제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단지 현재적으로만 제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 기독교 사상사에서 내재적이고 초월적인 신학의 변증법이, 묵시론적이고 종말론적인 종말론의 변증법이,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종말론의 변증법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지, 그 당위에 대해서 헤아리시어 부디 이 땅에서 기독교사상을 보편적 진리의 틀로 제시하시고자 하시는 선생님의 뜻이 더 합리적으로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글을 줄이면서 선생님이나 저나 한정된 시간과 지면으로 인해 소통의 어려움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지라도 그 한계를 넘어선 대화가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저의 견해에 대한 선생님의 입장을 확인한 후 대화를 계속 요청 드리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기자 간담회에서 기독교계에 공개토론을 요청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 신학을 전공(교회사)한 한 사람으로서 그 진지한 요구에 부담을 느껴 이렇게 메일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대화를 통해서 기독교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선생님과 저의 뜻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2007년 2월 28일
서초동 연구실에서
이국헌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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