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대표사찰로 성장한 내원정사 정련 스님
부산 대표사찰로 성장한 내원정사 정련 스님
천막법당 35년간 나무 심어 숲 일궈
유치원·재활병원등 복지사업 첨단경영 1일 부산 서구 서대신동 구덕산에 올랐다. 대도시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거진 숲이 반긴다. 내원정사는 이 숲 속에 있다. 왕대숲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들어서니, 주지 정련(65) 스님이 맞는다. 불교계의 대표적 실천가로서, 부산의 불교 바람을 일으킨 주역으로서 자신이나 자만 같은 것은 그와 통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언제나처럼 수줍은 듯 새색시 같은 모습의 그가 바로 구덕산의 숲과 내원정사를 일군 당사자다. 1972년 그가 구덕산에 천막 법당을 시작했을 때 이 일대엔 나무가 없거나 잡목들뿐이었다. 그는 절을 세우기 전 나무부터 심기 시작했다. 구덕산의 식생에 맞는 20여종을 골라 매년 수천그루씩 심었다. 그의 말 없는 노력이 오늘날 구덕산의 이 푸른 숲으로 나타났다. 불교세가 가장 강한 부산에서도 내원정사가 대표적인 사찰로 떠오르면서 불교계에선 너도나도 그의 첨단 절 경영 비법을 배우려 하지만, 실은 그는 현대인이라기보다는 옛사람이다. 대찰의 창건주임에도 여전히 새벽 3시30분이면 대웅전에서 함께 예불을 드리며 하루를 연다. 열여섯 살 나이에 부산 백양산 선암사로 출가한 그는 검소하기 그지없는 은사 석암 스님 아래서 도제식 승가 교육을 받으면서 밭을 개간하고 소를 치면서 수행했다. 그런 그가 이곳에서 천막 법당을 시작한 이래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유치원을 만들어내고, 불교계 최초로 재활 치료병원과 중증장애인 수영병원을 거제도에 개원했다. 그가 시작한 10여개의 사회복지사업들은 하나같이 불교계에서 신기원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 어떻게 촌스님에게 그런 성공이 가능했을까. 그를 아는 사람들은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그의 겸허한 심안에서 그 비결을 찾는다. 그는 말하기 전에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고수다. 그의 스승도 이번 부처님 오신 날 〈한국방송〉이 특집으로 다뤘던 지리산 벽송사 원응 스님이나 선가에서 내로라하는 동출 스님 등 그의 사형들을 두고 늘 그와 함께 살았다. 스승의 입이 떨어지기 전에 언제나 스승이 원하는 것을 미리 알아서 갖다 대령했기 때문에 스승은 언제나 만족해했다. 전국 최고 수준의 유치원도 아이들을 맡겨놓고도 못미더워하는 부모들의 심중을 100% 헤아린 덕이다. 그 많은 복지시설들을 후원해주는 불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그는 벌써 절 뒤 가장 좋은 터에 불자들이 참선도 하고, 사경(불경을 베껴 씀)도 하며 마음을 쉴 수 있는 시민선방을 설계 중이다. “불사라는 게 욕심 부린다고 되는 게 아니지요. 수행자답게 살면서 신심으로 해가면 절로 절로 되어갑니다.” 인터뷰 도중 그의 사형인 동출 스님이 다음날 은사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들어왔다. 사형에게 큰 절을 올리는 그의 모습에서 다시 옛사람의 정취가 묻어난다. 그의 겸허한 미소를 뒤로하고 돌아서니 구덕산의 대숲에서 불어온 솔바람이 뱃속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그가 말 없이 심은 한 그루 한 그루가 이렇게 큰 은혜를 나눠주고 있다. 부산/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유치원·재활병원등 복지사업 첨단경영 1일 부산 서구 서대신동 구덕산에 올랐다. 대도시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거진 숲이 반긴다. 내원정사는 이 숲 속에 있다. 왕대숲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들어서니, 주지 정련(65) 스님이 맞는다. 불교계의 대표적 실천가로서, 부산의 불교 바람을 일으킨 주역으로서 자신이나 자만 같은 것은 그와 통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언제나처럼 수줍은 듯 새색시 같은 모습의 그가 바로 구덕산의 숲과 내원정사를 일군 당사자다. 1972년 그가 구덕산에 천막 법당을 시작했을 때 이 일대엔 나무가 없거나 잡목들뿐이었다. 그는 절을 세우기 전 나무부터 심기 시작했다. 구덕산의 식생에 맞는 20여종을 골라 매년 수천그루씩 심었다. 그의 말 없는 노력이 오늘날 구덕산의 이 푸른 숲으로 나타났다. 불교세가 가장 강한 부산에서도 내원정사가 대표적인 사찰로 떠오르면서 불교계에선 너도나도 그의 첨단 절 경영 비법을 배우려 하지만, 실은 그는 현대인이라기보다는 옛사람이다. 대찰의 창건주임에도 여전히 새벽 3시30분이면 대웅전에서 함께 예불을 드리며 하루를 연다. 열여섯 살 나이에 부산 백양산 선암사로 출가한 그는 검소하기 그지없는 은사 석암 스님 아래서 도제식 승가 교육을 받으면서 밭을 개간하고 소를 치면서 수행했다. 그런 그가 이곳에서 천막 법당을 시작한 이래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유치원을 만들어내고, 불교계 최초로 재활 치료병원과 중증장애인 수영병원을 거제도에 개원했다. 그가 시작한 10여개의 사회복지사업들은 하나같이 불교계에서 신기원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 어떻게 촌스님에게 그런 성공이 가능했을까. 그를 아는 사람들은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그의 겸허한 심안에서 그 비결을 찾는다. 그는 말하기 전에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고수다. 그의 스승도 이번 부처님 오신 날 〈한국방송〉이 특집으로 다뤘던 지리산 벽송사 원응 스님이나 선가에서 내로라하는 동출 스님 등 그의 사형들을 두고 늘 그와 함께 살았다. 스승의 입이 떨어지기 전에 언제나 스승이 원하는 것을 미리 알아서 갖다 대령했기 때문에 스승은 언제나 만족해했다. 전국 최고 수준의 유치원도 아이들을 맡겨놓고도 못미더워하는 부모들의 심중을 100% 헤아린 덕이다. 그 많은 복지시설들을 후원해주는 불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그는 벌써 절 뒤 가장 좋은 터에 불자들이 참선도 하고, 사경(불경을 베껴 씀)도 하며 마음을 쉴 수 있는 시민선방을 설계 중이다. “불사라는 게 욕심 부린다고 되는 게 아니지요. 수행자답게 살면서 신심으로 해가면 절로 절로 되어갑니다.” 인터뷰 도중 그의 사형인 동출 스님이 다음날 은사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들어왔다. 사형에게 큰 절을 올리는 그의 모습에서 다시 옛사람의 정취가 묻어난다. 그의 겸허한 미소를 뒤로하고 돌아서니 구덕산의 대숲에서 불어온 솔바람이 뱃속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그가 말 없이 심은 한 그루 한 그루가 이렇게 큰 은혜를 나눠주고 있다. 부산/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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