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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블로그] 혁명가 예수의 오심을 기리며

등록 2008-12-26 14:26

‘크리스마스 이브’ 군요.

어렸을 적, 이 날은 무척 설레는 날이었지요. ‘산타’에 대한 환상이 깨지기 전까지는, 그러다가 어느 날 도둑처럼 내 머리맡에선 선물을 놓고 가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실눈 뜨고 목격한 순간, 그 환상은 깨졌고, 중고등학교 때는 다니던 교회에서 성탄 파티를 열고 밤새 함께 모여 논 까닭에 성탄을 기다리곤 했지요. 내가 좋아하던 그 여자아이의 환심을 사려 카드도 예쁘게 쓰고 주고 그랬던 기억도. 하하 모두 까마득한 옛날의 이야기군요.

솔직히, 별로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내 삶에서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 본 것은 아마 제가 천주교로 개종해서 영세 받던 때가 아니었던가 싶군요. 그때가 1995년 크리스마스던가 그랬으니, 이른바 모태신앙으로서 종교를 가졌지만, 실제로 제가 어떤 종교를 제 입장에서 선택했을 때야 저는 비로소 그 종교의 참 의미를 되새겨보려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날이 진짜 예수님 태어난 날과는 거리가 있고, 이것이 태양신 축제와 연관되어 당시 제도권에서 공인한 축제일임은 상식이지만, 그래도 ‘아무도 정확한 날짜를 아는 사람은 없기에’ 우리는 이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왕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날이라면 우리가 그만큼 경건하게 맞아야 할 텐데, 우리가 경건하게 맞고 있는 이것은 무엇인가 한 번 되돌아봐야 할 필요는 있다고 느껴집니다.


저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생각할 때, 철없는 제자들과, 맹목적으로 그를 따르던 군중들과, 그리고 이들에게 ‘비폭력’을 설파하셔야 했던, 어떤 비폭력주의 민족혁명가의 모습을 봅니다. 현대의 간디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느끼는 것은 아마 간디가 보여준 모습이 가장 진정한 ‘비폭력주의 사상가’ 의 모습이 아니었나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릇 혁명엔 피가 따라오기 마련이어서, 간디도, 그리고 그보다 약 2천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도 그 ‘죄를 대속’ 하기 위해,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성경, 별로 읽지 않는 편이지만 신약을 자세히 읽어보면, 저는 거기서 ‘인간의 고뇌’를 보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천사의 수태 고지를 받아들이는 인간 마리아의 고뇌. 처녀는 무척이나 당황했겠지요. 그리고 요셉은 갑자기 ‘남의 아이를 임신한’ 약혼자를 보며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 공생활에 있어서 그 고뇌의 압권이라면 당연히 처형되시기 전날밤의 고뇌였겠지요. ‘깨어 있으라’고 명령한 제자들은 잠만 잡니다. 당신은 내일 당신의 인간으로서의 삶이 끝나는 것임을 압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해방자’로서의 예수님을 따라온 것이지, 비폭력으로 평화를 설파하는 지도자를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로마의 식민통지 지배를 끝장내고, 그들이 앞세운 대리지배세력인 헤로데의 폭정도 뒤집어 엎고 새로운 왕조를 새울 수 있다고 믿은 그들에게 예수님은 비폭력을 설파하십니다. 당시 유태 혁명당원이었던 유다는 자신이 믿었던 과격한 방식의 혁명이 결국 실현되지 못할 것임을 깨닫자, 예수님께 걸었던 기대를 모두 접고, 당시 지배층이었던 바리사이인들, 그리고 헤로데 측의 인사들에게 예수님을 팔아버리고 맙니다.

예수님 고난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십자가이지만, 그 전에 인간적인 고뇌의 절정이라면, 바로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던 이가 그의 분명한 죽음을 앞두고 그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고뇌했던 올리브동산에서였을 것 같습니다.

그 핵심적인 메시지는 구원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왔다고 하는. 그래서 ‘원죄’에서 인간이 구원되어 새로이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죄의 ‘양’으로 왔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된 인간으로서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

인간적인 비폭력혁명가로서의 예수의 삶은, 인간의 눈으로 보기엔 실패자의 삶일 수밖에 없을 터입니다. 예수님 사후 제자들은 뿔뿔이 도망갔고, 부활 사건을 겪고서야 다시 예수님의 깃발 아래로 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승천 이후 그들은 그저 오합지졸에 불과한 삶들을 살게 됩니다. 여기서 다시 새로운 구원적 사건 하나가 발생하게 되니, 그것이 오순절의 성령강림이지요. 사도행전에 따르면, 다락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이 - 이건 거의 ‘숨어있던’ 수준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 어떤 계기로 인해 바깥으로 나와 예수의 구원 소식을 사방에 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때 상황으로 볼 때,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아마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그런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성령강림 사건 이후 어쨌든 그리스도교는 그제서야 ‘종교’로 불리울 수 있는 지지계층을 얻게 됩니다. 이후 바울의 전도여행 등을 통해 교세를 확장한 그리스도교는 유태의 벽을 넘어서 로마에까지 그 세력을 확산하게 됩니다. 이때 불안을 느낀 로마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교를 심각하게 탄압하는데, 이 과정은 셴케비치의 소설 ‘쿼바디스’의 모티프가 되어줬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혁명적 종교의 교세를 감당하지 못한 지배계층이 결국 그리스도교를 당시 지배계층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 사건은 그리스도교가 오늘날같이 타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게 됩니다. 피지배계층의 구원종교에서 지배계층의 종교로 변질된 그리스도교는 이후 중세로 이어지면서 온갖 부정과 타락의 온상이 됩니다. 원래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축제일은 부활이지만, 혁명성을 거세당한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축제일은 성탄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캘비니즘 등 온갖 속세의 모습들이 들어차면서, 오늘날 크리스마스는 ‘산타 클로스 할아버지의 빨간 옷, 하얀 수염, 그리고 온갖 선물들’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사회 최대의 소비 시즌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담 하나 하자면, 이 산타클로스의 이미지조차 ‘미제’라는 건데, 코카콜라 회사가 자사를 상징하는 색깔인 빨강과 하얀색으로만 이 산타의 모습을 디자인했다, 광고를 위해서, 뭐 그런 이야기더군요. 아무튼 자본주의 사회의 성장과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는 하나로 가는 건데,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가장 힘든 크리스마스를 맞고 있으니, 산타보다는 예수탄생 본질을 진짜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런 지 궁금합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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