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사제, ‘정 추기경 용퇴’ 촉구 왜?
한국 가톨릭계가 사상 초유의 분란에 휩싸였다. 가톨릭 최고지도자인 정진석(79) 추기경의 4대강 사업 발언에 대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이 ‘궤변’이라고 질타하고 나선 데 이어 13일 원로 사제 20여명이 ‘서울대교구장직에서 용퇴할 것’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교황-주교-사제들의 일사불란한 체제를 갖추고 순명을 최고의 미덕으로 내세우는 가톨릭에서 사제들이 추기경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며 심지어 용퇴를 주장하는 것은 가톨릭 역사에서 극히 이례적이다. 우리나라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국가보안법 유지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을 때 비판적인 견해가 나오며 긴장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김 추기경은 민주화와 인권에 대한 사제단의 지대한 기여를, 사제단은 김 추기경의 지도력을 서로 인정하고 배려하는 태도를 대체로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김수환 추기경이 정년(75살)을 맞아 은퇴한 지난 1998년 정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에 부임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정 추기경의 보수적 시각이 명동성당 일대를 지배하면서 민주화 성지로 여겨졌던 명동성당이 사제단의 기도회조차 허용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사건 폭로를 도왔던 사제단 대표를 맡은 전종훈 신부에 대해 정진석 서울대교구장은 관행에도 없는 안식년 발령을 3년이나 연속해 내리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교계 내에선 ‘정 추기경이 신부들의 사회 참여 의지를 박멸시키려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 용퇴 주장은 그동안 누적돼온 내부의 불만 목소리가 4대강 사업에 대한 정 추기경의 태도를 둘러싸고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주교단이 4대강 개발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라는 정 추기경의 발언과 달리 주교회의를 비롯한 신부들은 이미 4대강 반대를 기정사실화해왔다.
주교회의가 지난 3월13일 ‘4대강 사업이 자연환경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한 데 이어 4월10일 대구대교구 신부들은 대구 달성보 건설현장에서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생명평화미사’를 열었고,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제주 교구장)를 비롯한 전국의 주교, 신부, 신자 등 1천여명은 지난 6월 경기 양평 두물머리에서 미사를 드렸다. 이 자리에서 강 의장은 “주교단의 입장 표명은 하느님 백성들에게 드리는 주교들의 가르침이므로, 천주교 신자라면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주교회의는 10월 “4대강 사업은 대표적인 막개발”이라며 사목적 지침을 하달했고, 11월엔 광주대교구 김희중 대주교가 성당 강론을 통해 “먼저 밀어붙이고 이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려는 정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정 추기경 대신 해명에 나선 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는 13일 “정 추기경이 4대강 사업에 노골적으로 찬성을 하거나 정부 편을 든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정 추기경이 주교회의가 발표한 성명에 대해 자세하고 분명하게 해석해 설명한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고, 원로사제들은 연대 서명을 확대해나갈 계획이어서 가톨릭계는 당분간 분란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전망이다.
교계에서는 이번 사태의 저변에는 교구장 정년을 넘긴 정 추기경의 처신에 대한 불만도 깔려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정 추기경은 고 김수환 추기경과 달리 정년이 지났음에도 퇴직을 4년째 연장하고 있다.
한편 13일 발표된 성명에 서명한 원로사제 25명은 김병상 황상근(인천), 안승길 박무학(원주), 곽동철 연제식(청주), 송기인 박승원(부산), 김영식 이제민(마산), 정규완 조철현(광주), 문정현 이수현(전주), 방상복 안병선 류덕현 배명섭(수원), 권혁시(대구), 임문철(제주), 김순호(대전), 김택암 안충석 양홍 함세웅(서울교구) 신부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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