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1일 충북 단양 소백산 산위의마을에서 ‘인간은 변하는가 변하지 않는가’를 주제로 대담중인 ‘환희당 모임’ 멤버들. 왼쪽부터 김경재 목사, 김제원 교무, 법인 스님, 성해영 교수, 이응문 회장, 이정배 교수, 박기호 신부, 현웅 스님.
Ι‘인간변화’ 연속토론 환희당 대담Ι
모든 종교와 교육은 거듭남과 깨어남, 변화를 지향한다. 성현과 철학자들은 바람직한 변화를 위한 가르침을 펼쳤다. 그러나 석가와 예수가 이 땅에 출현한 지 2천여년이 지난 지금 물질과 과학의 변화는 매일 눈을 씻고 봐야 할 만큼 빠르지만, 인간의 변화가 성숙한 쪽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의 분출로 지구가 ‘폭발’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전망이 나온다. 인간이 내적으로 성숙되는 변화를 통해 개인은 지고한 영성을 고양하고, 세상은 좀더 평화롭고 아름다워질 수 없을까.
개인의 욕망을 제대로 알고
마음 직시해야 진리에 접근
조현 자신과 교인들의 변화된 모습을 많이 보는가?
김경재 목사 예수를 닮고자 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설교를 하면 듣는 이들은 좋다고는 하는데 잘 바뀌지는 않는다. 나와 마누라와 자식도 안 바뀌는데 무슨 욕심을 더 부리겠는가?
박기호 신부 ‘산위의마을’ 공동체를 7년째 하고 있다. 공동체는 각자의 마음대로 사는 게 아니고 공동체적 삶에 동참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변화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김제원 교무 인간 교화를 목표로 살아가지만, 에니어그램과 비슷한 성격분석 프로그램인 ‘피플 스마트’로 분석한 뒤 그 인물을 봤을 때 틀에 짜 맞춘 듯 그대로 행동하는 것을 볼 때마다 타고난 성격이 변하지 않는 것을 실감할 때가 많다. 박기호 그래서 가톨릭에선 인간 의지만으로는 변할 수 없어 은총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김경재 루터가 ‘인간의 의지가 없다’고 한 것에 대해 인문학에선 노예적 근성으로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의지로 통제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부분에 불과하고 은총을 통해 변화된다는 실존적 고백이다. 조현 하늘의 진리나 ‘무아적 진리’도 중요하지만 ‘유아적 특성’(개성)과 개인의 욕망을 제대로 아는 것, 즉 마음을 직시해야 적으로 쳐부수든 친구로 포용하든 할 것 아닌가. 그런 면에서 종교는 진리만 이야기할 뿐 우울한 인간의 마음엔 너무 불친절하지 않은가? 현웅 스님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가면을 쓴 종교인의 위선적인 모습을 많이 본다. 현실을 그대로 인정해버리는 진실 속에 희망이 있다. 그런 것을 부인하려 드니 더 업이 된다. 나도 어린 시절 부모의 잠자리 장면을 목격했는데, 출가자가 되어 성적인 것을 부인하니 그게 더 업이 되는 것을 느꼈다. 남자가 여자를 찾고 여자가 남자를 찾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했을 때 오히려 내면에 변화가 왔다. 종교가 현대인의 심리에 아부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게 문제 법인 스님 불교에선 (남자)출가자가 여자를 볼 때는 해골로 보도록 백골관을 한다. 그러나 여성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기보다는 아름다움을 긍정했을 때 오히려 억압이 해소돼 편해지고 극복됐다. 개인적으로는 어려서부터 남자보다 여자가 편하게 느껴졌는데, 그것은 성적 대상으로가 아니라 모성결핍에서 오는 그리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정배 교수 프로이트 이론에 따르면 어머니 뱃속에서 통일감을 느끼는 아이가 태어나 젖을 떼면서 죽음과도 같은 분리 경험을 하고, 이에 대한 보상심리가 물질이나 이성에 대한 집착과 소유로 나타난다고 한다. 성해영 교수 심리학은 인간이 진화 전 오랫동안 짐승처럼 살아서 의식 아래층엔 파괴와 성적 본능과 같은 욕망이 있으며, 그런 욕망을 완전히 끄기는 어렵고, 그것을 없애는 게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김경재 요즘은 종교가 현대인의 심리에 너무 아부하면서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 게 오히려 문제 아닌가. 고난을 다 면제해주었으니 그 옆에도 가지 말라고 꼬드겨서 만족을 시켜준다. 그러나 고난과 역경을 통해 인간은 진리에 눈을 뜨고 성숙해 가는 것 아닌가? 김제원 요즘 사람들은 채찍보다는 칭찬만 해주기를 바라지만, 실은 병이나 시련을 통해서 오히려 변화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정배 간디는 어린 시절 도둑질을 하고, 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욕구를 참지 못하고 섹스를 하면서 성찰을 통해 변화되어갔다. 유교사상가 왕양명도 베트남 쪽까지 귀양을 가서 백사천란(백번의 죽을 고비와 천번의 난관)을 겪으면서 무지렁이지만 순박한 농부들을 보며 불교의 불성(佛性)과 다름 없는 양지(良知)를 발견했다. 현웅 진정한 변화는 본성을 보는 데서 온다. 성인은 본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는 분들이다. 중생들은 남들을 중생으로 보지만, 부처는 모두를 부처로 보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어떻게 아브라함을 아느냐’고 했을 때 예수는 ‘나는 아브라함이 낳기 전에 있었다’고 했다. 화두선에서 ‘부모미생전 본래면목’(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 나의 본래 모습은 무엇인가)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해도 꿈쩍 안할 만큼 자기 본성에 대한 확신이 있는 성인이었다. 예수 말씀에도 화두선에도 탄생전 ‘자기본성’ 확신 있어 김경재 기독교는 원죄론을 말하고, 불교는 중생이 무명 속에 있다며 옥죄지만, 예수는 먹물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했지, 오히려 낮은 자들에겐 아버지의 천국을 너희도 누릴 수 있다고 격려했다. 이응문 회장 주역 괘사를 지은 문왕도 ‘너희 안에 신령한 거북을 두고 왜 다른 데서 찾느냐’고 했다. 하지만 종교는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이지만, 최고를 추구하기에 더 위험하다. 주역에서 첫번째 괘인 건(乾)괘 제일 위에 있는 효가 항룡유회(亢龍有悔)다. 하늘의 도를 구한다며 오를 줄밖에 모르면 후회한다. 결국 땅으로 내려오게 되어 있다. 하늘의 법도도 결국 땅에서 펼쳐지고, 인간을 변화시켜야 되는 것 아닌가?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전문 휴심정(well.hani.co.kr)
김제원 교무 인간 교화를 목표로 살아가지만, 에니어그램과 비슷한 성격분석 프로그램인 ‘피플 스마트’로 분석한 뒤 그 인물을 봤을 때 틀에 짜 맞춘 듯 그대로 행동하는 것을 볼 때마다 타고난 성격이 변하지 않는 것을 실감할 때가 많다. 박기호 그래서 가톨릭에선 인간 의지만으로는 변할 수 없어 은총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김경재 루터가 ‘인간의 의지가 없다’고 한 것에 대해 인문학에선 노예적 근성으로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의지로 통제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부분에 불과하고 은총을 통해 변화된다는 실존적 고백이다. 조현 하늘의 진리나 ‘무아적 진리’도 중요하지만 ‘유아적 특성’(개성)과 개인의 욕망을 제대로 아는 것, 즉 마음을 직시해야 적으로 쳐부수든 친구로 포용하든 할 것 아닌가. 그런 면에서 종교는 진리만 이야기할 뿐 우울한 인간의 마음엔 너무 불친절하지 않은가? 현웅 스님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가면을 쓴 종교인의 위선적인 모습을 많이 본다. 현실을 그대로 인정해버리는 진실 속에 희망이 있다. 그런 것을 부인하려 드니 더 업이 된다. 나도 어린 시절 부모의 잠자리 장면을 목격했는데, 출가자가 되어 성적인 것을 부인하니 그게 더 업이 되는 것을 느꼈다. 남자가 여자를 찾고 여자가 남자를 찾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했을 때 오히려 내면에 변화가 왔다. 종교가 현대인의 심리에 아부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게 문제 법인 스님 불교에선 (남자)출가자가 여자를 볼 때는 해골로 보도록 백골관을 한다. 그러나 여성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기보다는 아름다움을 긍정했을 때 오히려 억압이 해소돼 편해지고 극복됐다. 개인적으로는 어려서부터 남자보다 여자가 편하게 느껴졌는데, 그것은 성적 대상으로가 아니라 모성결핍에서 오는 그리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정배 교수 프로이트 이론에 따르면 어머니 뱃속에서 통일감을 느끼는 아이가 태어나 젖을 떼면서 죽음과도 같은 분리 경험을 하고, 이에 대한 보상심리가 물질이나 이성에 대한 집착과 소유로 나타난다고 한다. 성해영 교수 심리학은 인간이 진화 전 오랫동안 짐승처럼 살아서 의식 아래층엔 파괴와 성적 본능과 같은 욕망이 있으며, 그런 욕망을 완전히 끄기는 어렵고, 그것을 없애는 게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김경재 요즘은 종교가 현대인의 심리에 너무 아부하면서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 게 오히려 문제 아닌가. 고난을 다 면제해주었으니 그 옆에도 가지 말라고 꼬드겨서 만족을 시켜준다. 그러나 고난과 역경을 통해 인간은 진리에 눈을 뜨고 성숙해 가는 것 아닌가? 김제원 요즘 사람들은 채찍보다는 칭찬만 해주기를 바라지만, 실은 병이나 시련을 통해서 오히려 변화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정배 간디는 어린 시절 도둑질을 하고, 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욕구를 참지 못하고 섹스를 하면서 성찰을 통해 변화되어갔다. 유교사상가 왕양명도 베트남 쪽까지 귀양을 가서 백사천란(백번의 죽을 고비와 천번의 난관)을 겪으면서 무지렁이지만 순박한 농부들을 보며 불교의 불성(佛性)과 다름 없는 양지(良知)를 발견했다. 현웅 진정한 변화는 본성을 보는 데서 온다. 성인은 본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는 분들이다. 중생들은 남들을 중생으로 보지만, 부처는 모두를 부처로 보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어떻게 아브라함을 아느냐’고 했을 때 예수는 ‘나는 아브라함이 낳기 전에 있었다’고 했다. 화두선에서 ‘부모미생전 본래면목’(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 나의 본래 모습은 무엇인가)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해도 꿈쩍 안할 만큼 자기 본성에 대한 확신이 있는 성인이었다. 예수 말씀에도 화두선에도 탄생전 ‘자기본성’ 확신 있어 김경재 기독교는 원죄론을 말하고, 불교는 중생이 무명 속에 있다며 옥죄지만, 예수는 먹물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했지, 오히려 낮은 자들에겐 아버지의 천국을 너희도 누릴 수 있다고 격려했다. 이응문 회장 주역 괘사를 지은 문왕도 ‘너희 안에 신령한 거북을 두고 왜 다른 데서 찾느냐’고 했다. 하지만 종교는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이지만, 최고를 추구하기에 더 위험하다. 주역에서 첫번째 괘인 건(乾)괘 제일 위에 있는 효가 항룡유회(亢龍有悔)다. 하늘의 도를 구한다며 오를 줄밖에 모르면 후회한다. 결국 땅으로 내려오게 되어 있다. 하늘의 법도도 결국 땅에서 펼쳐지고, 인간을 변화시켜야 되는 것 아닌가?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전문 휴심정(we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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