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기어, 산사체험 접고 떠난 까닭은
“자비·인권·비폭력 등 불교적 가치 눈감아” 불교시민단체 쓴소리
“자비·인권·비폭력 등 불교적 가치 눈감아” 불교시민단체 쓴소리
미국 할리우드 유명배우인 리처드 기어가 지난 20~25일 방한했을 때 한국 불교계가 취한 태도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을 비롯해 기어를 만난 불교계 인사들은 중국 정부의 탄압으로 고통 받는 티베트의 인권 문제 등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방한 중 자신이 영화배우로만 화제가 되는 상황에 답답해한 것으로 전해졌다. 리처드 기어는 지난 20여년 동안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대변자를 자임하며 중국 정부의 티베트 불교에 대한 탄압 등을 서구 사회에 널리 알리는 데 애써왔다.
지난 21일 리처드 기어와 총무원장의 만남 자리에서 ‘티베트’ 문제가 언급되지 않은 데 대해, 조계종의 한 중진 스님은 “리처드 기어는 사실상 달라이 라마의 특사나 다름없는 인물인데, 그를 할리우드 영화배우로만 대하고 정작 고통 받는 티베트 불교와 달라이 라마에 대해 종교지도자로서 자비심을 담은 의례적 언급조차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평했다.
기어의 통역을 맡았던 혜민 스님은 “리처드 기어는 티베트인들의 실상을 전하고, 차분히 한국 불교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했지만, 가는 곳마다 영화 이야기만 해 답답해했다”며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는 마치 하지 않기로 약속이나 한 듯이 아무 데서도 꺼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22일 리처드 기어의 티베트 사진 등을 출품한 사진전 ‘순례의 길’(서울 예술의전당) 개막식에 앞서 열린 그의 기자회견에서 주최 쪽은 기자들에게 “리처드 기어에게 어떤 정치적 질문도 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기어는 한 사진을 설명하면서 “티베트 교도소에서 중국 정부로부터 고문받은 여승들을 찍은 것이며, 티베트와 중국에서 여전히 티베트인들에게 이런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는 중국 정부의 압박으로 2000년 이래 여러 차례 달라이 라마의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조계종 역시 국가가 장악한 중국 불교계와는 처지가 다른데도 정부 기조에 비판 없이 동조해왔다.
정웅기 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 집행위원장은 “(한국 불교가) 자비와 인권, 비폭력 등 불교적 가치를 인류사회에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대응하고 연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별다른 비전이 없다는 것을 이번 리처드 기어의 방한 때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기어는 경남 양산 통도사와 대구 동화사 등을 방문해 한국 불교를 체험할 계획이었으나 날씨 등을 이유로 들어 결국 산사체험 계획을 취소하고 떠났다.
이에 대해 리처드 기어와 총무원장의 만남에 배석한 조계종 기획실장 정만 스님은 “리처드 기어가 ‘여기서 먹는 맛있는 음식과 달리 티베트에서 먹은 음식은 거칠고 먹기 어렵다’는 이야기만 했을 뿐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문제 등에 대한 대화는 없었다”며 “자리가 번잡하고 리처드 기어의 가족까지 함께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나눌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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