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종교

꾸부정한 할머니의 볏단 속에…

등록 2013-09-10 19:31

김인수 민들레학교 교장
김인수 민들레학교 교장
[휴심정] 나를 울린 이 사람
십년쯤 되었을까. 지금 살고 있는 갈전마을에 가을장마가 여러 날 계속되었다. 다행히 벼 수확을 일찍 한 농민도 있었지만 이제야 볏단을 베어 논바닥에 말리는 농민들도 있었다. 볕만 좋으면 2~3일 만에 탈곡을 끝낼 수 있지만 비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논바닥에 누인 볏단이 축축했다.

병철이네 할머니도 벼 한 포기라도 더 말리려고 꾸부정한 허리를 기역자로 더 구부리면서 볏단을 뒤집고 계셨다. 동네 입구 첫 집에 사시는 병철이네 할머니댁은 이전에 전답이 많아 부잣집으로 불리는 집안이었으나 몇해 전 남편을 보내고 아들네 식구와 함께 천연한 웃음을 지으며 사시는 할머니셨다. 늘 마당을 깨끗이 하고 콩알 하나라도 허투루 굴러다니지 않게 한 분이셨다.

그 병철이네 할머니가 넓은 들에서 느린 걸음으로 허리를 폈다 구부렸다 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일손을 조금 덜어드릴까 싶어 개울을 건너가서 볏단 뒤집는 작업을 돕기 시작했다. 벼를 뒤집으면서 깜짝 놀랐다. 수확기의 잦은 비 때문에 베어놓은 벼에서 싹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가 한해 농사 망치겠다 싶은 절망감이 들었다. 볏단을 뒤집고 있는 내 눈에서 눈물이 핑 돌고 속이 먹먹해졌다. ‘이 땅의 농촌을 이런 분들이 지켜내고 있구나. 느린 걸음걸이와 꾸부정한 허리와 쇠약한 목소리와 갈퀴 같은 손바닥과 친구 되어 벼가 자라는구나. 농민은 한 톨의 쌀이라도 금싸라기처럼 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 하는 심정이 되었다. 여러 해 농사랍시고 해왔지만 그날 비로소 ‘농민의 마음’이 가슴 깊이 새겨졌다.

우리는 쌀과 채소를 먹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땀과 눈물을 먹는 것이다. 우리는 돈만 주면 살 수 있는 양식을 먹는 것이 아니다. 값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농민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 알아야 할 것은 하늘의 햇빛 한줌, 빗방울 하나가 우리에겐 그냥 스쳐 지날지 모르지만 농민에게는 절망이요 기도가 된다는 사실 말이다.

김인수 민들레학교 교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