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다람살라에서 26년째 수행하며 오지인들을 돕고 있는 청전 스님. 사진 전제우 작가
[휴심정] 신부와 승려 히말라야 동행
매년 여름 20여년째 히말라야 인도 북부 라다크로 향한다.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오지의 곰파(절)와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 온갖 의약품부터 돋보기, 보청기, 학용품이나 옷가지까지 문명의 이기물인 생필품을 전해주기 위한 길이다. 이 세세한 물품은 거의 일 년 동안 준비하는 소중한 것들이기도 하다.
라다크 지방은 고지대라서 여름이 다 되어서야 긴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높은 고개들이 하나씩 하나씩 열린다.
함께 길을 갈 대원은 이미 한 해 전에 결정이 난다. 올해는 세 분이 지원해 각자 개인적으로 출발해 며칠 전에 들어왔다. 한국에서 교수 한 명과 재가불자 한 명, 그리고 멀리 파리에서 유학중인 스님이다. 항상 인원 제한을 하는데 인도산 지프차에 탈 수 있는 정원이 정해져 있는데다 무엇보다도 그 많은 짐 때문이다. 며칠간 심사숙고 끝에 지역별로 나눈 짐이 대형 가방으로 일곱 개나 된다. 운전수를 포함해 다섯이 탑승해야 하니 늘 비좁기만 하다.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한 달이 넘는, 고난도 봉사활동이라서 집 떠날 때 마음가짐도 예사로운 게 아니다. 그런데 출발 전전날 이른 아침에 뜬금없는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뜻밖의 방문객이 지금 막 델리에서 밤 버스로 올라와 다람살라에 도착했단다. 꾀죄죄한 모습으로 도착한 두 분은 가톨릭 신부님이다. 네팔에서 에베레스트며 마나슬루까지 트레킹을 마치고 올라오셨다는 두 신부님, 안식년을 맞아 여기에 오게 되었단다. 좀 나이 들어 보이는 레오 신부님의 첫 말씀이 이색적이다.
“저는 밥돌이 신부예요.”
알고 보니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매일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을 한단다. 일이 바빠 30년 만에 처음 얻은 안식년이란다. 레오 신부님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분이다. 두 분 다 수도원장을 지냈다.
두 신부님도 가고 싶어 하는데 그 좁은 지프차에 어떻게 탈 것인가. 궁여지책으로 차량 위에 철제 구조물을 올리기로 했다.
출발. 첫 관문이라 할 조지라(3650m)를 무사히 넘긴 했지만 파리 유학승은 사색이다. 하긴 포장이 되어 있나, 난간이 있나, 천 길 낭떠러지 고갯길에서 아찔해진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길을 수없이 넘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스님으로선 소름 끼치는 길이기도 하겠지.
히말라야 인도 북부 라다크로
생필품 전하러 가는 한달 여정
냉기 가득한 동굴 사원에서
어떻게 수행만으로 견뎌냈을까
서로의 빛으로 반짝이는
밤하늘 별무리에 평화 깃들어 고승의 수도 동굴에 든 가톨릭 수도원장 인솔 총책임자로서 내심 일행 중에 고산증세가 나타나면 어쩔까 하는 걱정이 따랐다. 첫날은 일부러 고소를 익힐 겸 제법 낮은 3300m 정도의 카르길 지역 마지막 회교도 마을인 파르카치크에서 묵기로 했다. 파르카치크는 해발 7135m 눈(Nun) 산과 7087m의 쿤(Kun) 산 두 개가 피라미드 형제처럼 멋진 만년설의 위용을 자랑하며 자리잡고 있어 더러 유명 산악인들이 군침을 삼키는 곳이기도 하다. 예상대로 대원 중의 한 사람인 교수님이 두통을 하소연하며 드러눕는다. 이튿날 아침에 겨우 일어나기는 했지만 어떤 먹거리도 거부한다. 그러나 우리의 발길은 하루도 늦출 수 없다. 어느 날이건 간에 아침은 서둘러야 한다. 머리가 아파 빠개질 듯하다는 환자에게 가면 서서히 적응할 거라는 위로의 말 외엔 방법이 없다. 다행히 그날 하루 힘들어하더니 고소 적응이 쉽게 이루어졌다. 드디어 잔스카르 계곡의 초입, 하얀 불탑과 함께 오색의 타르촉 깃발이 나부낀다. 두어 시간을 달리니 황량한 붉은 뒷산을 배경으로 4100m나 높게 자리한 첫번째 곰파 랑둠 사원이 아스라이 다가온다. 14년 전 슬픈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절의 세 스님이 회교도들이 쏜 총에 살해되었다. 범인은 미궁이다. 이 열린 시대에도 공존할 수 없다니. 특히 사랑과 자비를 말하는 종교가 더하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절 초입에 세 스님의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늘 절에 들어가면 출석을 부르듯 한 스님, 한 스님 명단을 부른다. 다행히도 한 해 동안 돌아가신 노스님이 없다. 곰파에 가면 항상 티베트식 버터차를 대접받는데 이 절은 마른 야크 고기가 안주처럼 나온다. 이 지역의 식사 대용품이다. 처음으로 야크 고기 맛을 본다는 일행들이 마른 명태 맛이라며 씹어 먹는다. 먹다 남은 고기를 가져가겠다고 하니, 소임 보는 라마승이 따로 하얀 천에 듬뿍 고기를 싸준다. 절 규모가 작아 영양제와 몇 가지 일용품을 챙겨드리고는 바로 다음 절로 가기로 했다. 바삐 서둘러도 굽이굽이 비포장 길을 가는 건 더디기만 하다. 가끔 휘몰아치는 까탈스런 바람에 먼지를 뒤집어쓰기 예사다. 펜지라(4550m)를 넘으면서, 아래쪽에 그대로 처박힌 채 찌그러져 있는 버스 잔해가 눈에 밟혀 마음이 저민다. 여름에만 운행되는 레에서 파둠까지의 노선버스, 매일 있는 정기 버스가 아니라, 승객이 차야 움직이는 이 버스가 4년 전에 저 아래로 굴러떨어진 것이다. 11명이 죽고 5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저녁 무렵에 파둠 못미처 있는 샤니 곰파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원래는 종쿨 곰파에서 묵을 예정이었지만 그곳까지 도착하기 어려워서다. 샤니 곰파는 인도 후기불교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성자 나로파(1016~1100)의 사리탑이 있는 성지다. 이분의 인생 역정이 가관인 것이, 한때 그 유명한 날란다(현 인도 비하르주에 있었던 불교 최대의 승가대학)의 학장으로 있다가 모든 지위와 명예를 버리고 틸로파(988~1069)를 스승으로 12년간 난행고행을 자처했다. 나로파의 법제자가 티베트인인 마르파이며 이분의 수제자가 바로 세상에 잘 알려진 고행 성자 밀라레파(1052~1135)다.
원래 어제 묵기로 했던 종쿨 곰파의 동굴 사원은 바로 밀라레파 성자의 마지막 수행지로 여기서 해탈의 깨달음을 성취한 역사적인 성지이자 천혜의 동굴 사원이다. 지대가 너무 높고 햇볕이 차단된 동굴 사원 안에는 냉기가 차디차게 배어 있다.
지금도 이렇게 도달하기 어려운 이런 외진 곳에서 그 시대 무얼 먹고 살았을까? 설령 먹거리를 얻었다 해도 철저히 혼자인 이 자리에서 인간적인 고독의 시간을 과연 수행만으로 견뎌낼 수 있었을까?
첨단 문명과 복잡해진 도시 문화에 길들여진 성직자들에게 이런 동굴 수행처는 잊혀진 지 오래다. 신부님 중 한 분은 이미 여러 해 전에 지리산 기슭에 가톨릭 명상 수도원을 개설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참 수도자의 영성임을 알아차리고 시작한 일이다. 이런 자리에 함께 온 것도 다 “하느님의 섭리”(Providence of God)라고 하신다. 불교적으로는 인연법이다.
동굴 바로 아래쪽에선 성자가 마시며 득도를 이뤘다는 ‘둡추’(성취수)가 한 방울씩 떨어진다. 컴컴한 동굴 속이라서 조심하지 않으면 바위에 이마를 상할 수 있어 손전등 없이는 접근이 어렵다. 우리도 그 차가운 물을 맘껏 마셨다.
이제 하산 길이다. 다시 샤니 곰파에 들어오니 더 많은 노인들이며 약을 찾는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문명과는 거리가 먼 열악한 환경에서 늘 그놈의 병치레가 주민들의 삶을 괴롭힌다.
별들의 축복 아래 함께 누운 신부와 승려
힘든 고개 푸르피라(3950m)는 각자 힘에 맞게 넘기로 했다. 내려가는 길이 완전 지그재그로 무척 가파르다. 아니 무섭게 가파르다. 레오 신부님은 무릎이 약하다며 꼴찌로 천천히 내려간다.
평지에 닿으니 두 스님은 말을 초지에 풀어두고 야크 똥을 주워 모아 불을 지피며 소금차를 만들고 있다. 이 자리는 스님들이 징첸이라고 부르는 비박 장소다.
자리에 눕기 전에 비상식량으로 챙겨놓은 우리 라면을 말린 야크 똥 위에서 끓여낸 맛이라니! 누구하나 사양치 않고 퍼주는 대로 받아먹는데, 배고플 때 먹는 이런 맛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마부 스님 둘에게 따로 라면 두 개를 주었는데, “뻬 심뽀둑, 뻬 심뽀둑”을 연발한다. 정말 맛있다는 티베트 말이다.
먹기가 바쁘게 다들 자리에 눕는다. 얼마나 피곤한가. 각자 풀이 우거진 곳을 깔개 삼아 잠자리를 만든다. 레오 신부님과 파리 스님은 유목민이 만들어둔 흙집 바닥에서 자기로 하고 나머지 넷은 낭만을 즐길 요량으로 그냥 하늘을 지붕 삼는다.
라다크 지역은 거의 비가 내리지 않기에 텐트 없이도 비 걱정 없이 이런 잠자리를 만들 수 있다. 누워서 보는 밤하늘의 별무리는 그 얼마나 황홀한가. 인공 불빛이 없는 이 맑고 맑은 별무리를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수많은 별들이 서로의 빛으로 반짝이는 하늘 아래서 가톨릭의 성직자와 불교의 승려가 함께 누운 밤이 평화롭다.
청전 스님
지난 8월 인도와 티베트의 경계인 라다크의 험난한 산길을 넘고 있는 순례단들. 사진 지승도 항공대 교수
생필품 전하러 가는 한달 여정
냉기 가득한 동굴 사원에서
어떻게 수행만으로 견뎌냈을까
서로의 빛으로 반짝이는
밤하늘 별무리에 평화 깃들어 고승의 수도 동굴에 든 가톨릭 수도원장 인솔 총책임자로서 내심 일행 중에 고산증세가 나타나면 어쩔까 하는 걱정이 따랐다. 첫날은 일부러 고소를 익힐 겸 제법 낮은 3300m 정도의 카르길 지역 마지막 회교도 마을인 파르카치크에서 묵기로 했다. 파르카치크는 해발 7135m 눈(Nun) 산과 7087m의 쿤(Kun) 산 두 개가 피라미드 형제처럼 멋진 만년설의 위용을 자랑하며 자리잡고 있어 더러 유명 산악인들이 군침을 삼키는 곳이기도 하다. 예상대로 대원 중의 한 사람인 교수님이 두통을 하소연하며 드러눕는다. 이튿날 아침에 겨우 일어나기는 했지만 어떤 먹거리도 거부한다. 그러나 우리의 발길은 하루도 늦출 수 없다. 어느 날이건 간에 아침은 서둘러야 한다. 머리가 아파 빠개질 듯하다는 환자에게 가면 서서히 적응할 거라는 위로의 말 외엔 방법이 없다. 다행히 그날 하루 힘들어하더니 고소 적응이 쉽게 이루어졌다. 드디어 잔스카르 계곡의 초입, 하얀 불탑과 함께 오색의 타르촉 깃발이 나부낀다. 두어 시간을 달리니 황량한 붉은 뒷산을 배경으로 4100m나 높게 자리한 첫번째 곰파 랑둠 사원이 아스라이 다가온다. 14년 전 슬픈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절의 세 스님이 회교도들이 쏜 총에 살해되었다. 범인은 미궁이다. 이 열린 시대에도 공존할 수 없다니. 특히 사랑과 자비를 말하는 종교가 더하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절 초입에 세 스님의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늘 절에 들어가면 출석을 부르듯 한 스님, 한 스님 명단을 부른다. 다행히도 한 해 동안 돌아가신 노스님이 없다. 곰파에 가면 항상 티베트식 버터차를 대접받는데 이 절은 마른 야크 고기가 안주처럼 나온다. 이 지역의 식사 대용품이다. 처음으로 야크 고기 맛을 본다는 일행들이 마른 명태 맛이라며 씹어 먹는다. 먹다 남은 고기를 가져가겠다고 하니, 소임 보는 라마승이 따로 하얀 천에 듬뿍 고기를 싸준다. 절 규모가 작아 영양제와 몇 가지 일용품을 챙겨드리고는 바로 다음 절로 가기로 했다. 바삐 서둘러도 굽이굽이 비포장 길을 가는 건 더디기만 하다. 가끔 휘몰아치는 까탈스런 바람에 먼지를 뒤집어쓰기 예사다. 펜지라(4550m)를 넘으면서, 아래쪽에 그대로 처박힌 채 찌그러져 있는 버스 잔해가 눈에 밟혀 마음이 저민다. 여름에만 운행되는 레에서 파둠까지의 노선버스, 매일 있는 정기 버스가 아니라, 승객이 차야 움직이는 이 버스가 4년 전에 저 아래로 굴러떨어진 것이다. 11명이 죽고 5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저녁 무렵에 파둠 못미처 있는 샤니 곰파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원래는 종쿨 곰파에서 묵을 예정이었지만 그곳까지 도착하기 어려워서다. 샤니 곰파는 인도 후기불교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성자 나로파(1016~1100)의 사리탑이 있는 성지다. 이분의 인생 역정이 가관인 것이, 한때 그 유명한 날란다(현 인도 비하르주에 있었던 불교 최대의 승가대학)의 학장으로 있다가 모든 지위와 명예를 버리고 틸로파(988~1069)를 스승으로 12년간 난행고행을 자처했다. 나로파의 법제자가 티베트인인 마르파이며 이분의 수제자가 바로 세상에 잘 알려진 고행 성자 밀라레파(1052~1135)다.
지난여름 라다크 순례를 함께 떠난 레오(왼쪽)·실베스델 두 신부와 함께한 청전 스님. 사진 지승도 항공대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