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처럼 낡은 집에서도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소녀를 그린 고은비 화백의 그림. 고 화백은 필자 고진하 목사·시인의 딸이다.
[휴심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법
‘사랑해!’라는 말 대신에 ‘고마워!’라는 말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왠지 낯 뜨거워서 잘 못합니다. 차라리 누군가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나면 훈훈한 느낌이 들어 좋습니다. 내 안에 영혼의 벽난로 하나 들여놓은 듯!
매일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는 이, 낯선 길을 친절히 일러주는 이, 외롭고 쓸쓸할 때 곁에서 말벗이 되어주는 이, 무엇을 받을 만한 공덕을 쌓은 일도 없는데 소중한 선물을 안겨주는 이들에게 당연한 듯 받지 않고 고마움을 표시합니다. 그러면 그와 나 사이에 벽난로를 둔 듯 기쁨의 온기가 전해집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나 아닌 누군가의 숨결과 땀과 눈물과 희생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이 아니던가요. 그래서 김현승 시인은 감사하는 마음은 언제나 “은혜의 불빛 앞에 있다.”고 노래 부르는지도 모릅니다.
시인의 마음속을 비추는 그 ‘은혜의 불빛’이, 방랑과 정박 사이에 있는 우리의 삶을 은은히 비춰줍니다. 시인은 그 불빛에 기대어 마음의 항구에 닻을 내린 채 하염없이 방랑하던 믿음의 선조들의 삶을 반추합니다. 방랑은 모든 인간의 피치 못할 운명.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첫 사람 아담이 그러했고, 이집트 땅에서 추방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시인은 믿음의 선조들이 방랑의 고통 속에서도 늘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기억해냅니다. 기억은 영혼의 아름다운 본성이라던가요. 시인은 믿음의 선조들이 방랑의 세월을 겪는 동안 굶주림, 사나운 맹수들, 마음속 우상과 싸우면서도 ‘제단을 쌓고 첫 열매를 드리었’던 것을 기억해냅니다. 그러면 김현승의 시를 펼쳐볼까요.
“…받았기에/누렸기에/배불렀기에/감사하지 않는다./추방에서/맹수와의 싸움에서/낯선 광야에서도/용감한 조상들은 제단을 쌓고/첫 열매를 드리었다.//허물어진 마을에서/불 없는 방에서//빵 없는 아침에도/가난한 과부들은/남은 것을 모아 드리었다./드리려고 드렸더니/드리기 위하여 드렸더니/더 많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감사하는 마음> 부분)
평화롭고 안온한 삶 속에서 감사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행운의 여신이 선물꾸러미를 한 아름 안고 찾아올 때 감사하는 것도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허물어진 마을에서/불 없는 방에서/빵 없는 아침에’ 감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요. 예기치 못한 고통과 불행이 엄습할 때, 불치의 병에 걸렸거나 애지중지하던 소유를 잃었을 때 감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요.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몸 바쳐 일하다가 고초를 겪고, 불의한 세력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볼 때 감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요.
사실상 이러한 감사는 신심이 두터운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감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라 불러봅니다. 그런 감사의 마음을 지녔던 성서의 인물로는 이스라엘의 선지자 하박국이 있지요.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련다.”(하바국 3: 17-18)
매일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는 이
낯선 길을 친절히 일러주는 이
흔한 것들이 정녕 귀한 것인데
감사의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불의한 세력이 승승장구할 때
감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우리의 무덤마저 빼앗을 때에도
희망의 불을 붙여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런 감사의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없음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는커녕 넉넉한 소유를 지니고 있어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너나없이 자본의 맹독에 물들어서 말이죠. 자본의 맹독에 물들면 우리가 흔하게 취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감사하지 않습니다. 물론 흔한 것들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흔치 않은 것, 돈 되는 것들만 귀하게 여깁니다. 흔한 것들이 정녕 귀한 것인데 말입니다. 돈 없이 구할 수 있는 것들, 예컨대 햇빛, 공기, 바람, 아름다운 저녁놀, 무지개, 바다의 수평선, 산과 들에 널린 야생초 같은 것들은 얼마나 흔하며 귀합니까. 더 나아가 값없이 사용할 수 있는 우주의 무한에너지원인 자비나 사랑은 또 얼마나 흔하며 귀합니까. 자기 생명의 주재가 현존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분들에게 해당하는 말이지만, 하느님은 또 얼마나 흔한 분입니까. 무소부재(無所不在)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알든 모르든 이런 흔한 분을 모시고 살면서 너무 흔한 분이기에 귀한 줄을 모릅니다. 흔한 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인 줄 모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저는 우리의 감사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흔한 것이 참으로 귀한 것임을 알고 흔한 것들에 대해 먼저 감사의 마음을 갖자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의 마음을 지닌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소유도 모두 하느님에게 속한 것이라는 뚜렷한 자각을 지닙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더 이상 ‘나의 것’이라 불릴 만한 것이 따로 없지요. 그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임대한’ 것처럼 여깁니다. 지구별에 와 잠시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 무소유의 바람 속을 달리는 보헤미안 같은 존재일 뿐이므로. 설사 지구별 위에 자기 이름으로 등기된 집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마치 ‘세입자’처럼 살아갑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 감각과 이성, 돈과 명예, 가족과 친구, 그리고 숱한 관계들조차 우리가 지구별 위에 살아가는 동안 잠시 빌려 쓰는 렌터카 같은 것이 아니던가요. 이런 자각을 서늘하게 가슴에 새기고 있는 시인은 무르익은 과일처럼 잘 숙성된 시구를 들려줍니다. “감사하는 마음─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내가 누구인지를 그리고/주인이 누구인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아는 마음’이란 곧 깨달음을 말합니다. 그 깨달음이란, 나는 피조물이고 나를 지은 조물주가 따로 계시다는 것. 나는 종에 불과하고 나를 부리는 주인이 따로 계시다는 것.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으신 분에 의해 ‘살려지는’ 것이라는 것. 이런 깨달음의 눈이 열리면 마치 돋보기를 낀 것처럼 희미하게 보이던 것들이 명료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벌거숭이인 나의 모습과 벌거숭이인 나를 은총으로 감싸주시는 이의 모습이 하나로 포개집니다. 나의 헐벗은 마음에 무한이 포개지는 순간입니다. 자기 에고를 텅 비운 유한한 존재가 무한으로 솟아오르는 비약의 순간입니다. 티끌처럼 하찮은 우리가 ‘하느님의 걸작’으로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바로 이런 순간이 우리를 감사의 사람으로, 또 희망의 사람으로 개화(開花)하도록 해주지요. “온 세상에 불이 꺼져 캄캄할 때에도,/내가 찾는 얼굴들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우리는 생각하는 갈대 끝으로/희망에서 불을 붙여 온다.//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때에도 /우리의 무덤마저 빼앗을 때에도/우릴 빼앗을 수 없는 우리의 희망!//우리에게 한 번 주어 버린 것을/오오, 우리의 신(神)도 뉘우치고 있을/너와 나의 희망! 우리의 희망!(김현승, <희망> 부분) 온 세상이 캄캄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도 ‘희망에서 불을 붙여’ 오는 사람. 도무지 감사할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사의 마음을 일으키는 사람. 이런 이의 영혼은 곧 ‘축복 받은 궁전’이며, ‘하느님의 가장 아름다운 집’(줄리앙 노르위치)입니다. 이제사 고백하자면, 나는 이 시를 읽다가 울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도무지 내일을 가늠할 수 없고, 어디에서도 희망의 싹을 발견할 수 없던 젊은 날. ‘오오, 우리의 신도 뉘우치고 있을/너와 나의 희망!’이라는 대목에서.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시인의 거룩한 긍정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샴쌍둥이만 같은 감사와 희망. 그렇습니다. 감사와 희망이 ‘깜깜한 하늘에 갇히면 별이 되어 먼 언덕 위에서 빛난다’는 것을 믿으므로. 고진하(목사·시인)
낯선 길을 친절히 일러주는 이
흔한 것들이 정녕 귀한 것인데
감사의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불의한 세력이 승승장구할 때
감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우리의 무덤마저 빼앗을 때에도
희망의 불을 붙여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런 감사의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없음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는커녕 넉넉한 소유를 지니고 있어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너나없이 자본의 맹독에 물들어서 말이죠. 자본의 맹독에 물들면 우리가 흔하게 취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감사하지 않습니다. 물론 흔한 것들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흔치 않은 것, 돈 되는 것들만 귀하게 여깁니다. 흔한 것들이 정녕 귀한 것인데 말입니다. 돈 없이 구할 수 있는 것들, 예컨대 햇빛, 공기, 바람, 아름다운 저녁놀, 무지개, 바다의 수평선, 산과 들에 널린 야생초 같은 것들은 얼마나 흔하며 귀합니까. 더 나아가 값없이 사용할 수 있는 우주의 무한에너지원인 자비나 사랑은 또 얼마나 흔하며 귀합니까. 자기 생명의 주재가 현존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분들에게 해당하는 말이지만, 하느님은 또 얼마나 흔한 분입니까. 무소부재(無所不在)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알든 모르든 이런 흔한 분을 모시고 살면서 너무 흔한 분이기에 귀한 줄을 모릅니다. 흔한 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인 줄 모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저는 우리의 감사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흔한 것이 참으로 귀한 것임을 알고 흔한 것들에 대해 먼저 감사의 마음을 갖자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의 마음을 지닌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소유도 모두 하느님에게 속한 것이라는 뚜렷한 자각을 지닙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더 이상 ‘나의 것’이라 불릴 만한 것이 따로 없지요. 그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임대한’ 것처럼 여깁니다. 지구별에 와 잠시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 무소유의 바람 속을 달리는 보헤미안 같은 존재일 뿐이므로. 설사 지구별 위에 자기 이름으로 등기된 집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마치 ‘세입자’처럼 살아갑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 감각과 이성, 돈과 명예, 가족과 친구, 그리고 숱한 관계들조차 우리가 지구별 위에 살아가는 동안 잠시 빌려 쓰는 렌터카 같은 것이 아니던가요. 이런 자각을 서늘하게 가슴에 새기고 있는 시인은 무르익은 과일처럼 잘 숙성된 시구를 들려줍니다. “감사하는 마음─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내가 누구인지를 그리고/주인이 누구인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아는 마음’이란 곧 깨달음을 말합니다. 그 깨달음이란, 나는 피조물이고 나를 지은 조물주가 따로 계시다는 것. 나는 종에 불과하고 나를 부리는 주인이 따로 계시다는 것.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으신 분에 의해 ‘살려지는’ 것이라는 것. 이런 깨달음의 눈이 열리면 마치 돋보기를 낀 것처럼 희미하게 보이던 것들이 명료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벌거숭이인 나의 모습과 벌거숭이인 나를 은총으로 감싸주시는 이의 모습이 하나로 포개집니다. 나의 헐벗은 마음에 무한이 포개지는 순간입니다. 자기 에고를 텅 비운 유한한 존재가 무한으로 솟아오르는 비약의 순간입니다. 티끌처럼 하찮은 우리가 ‘하느님의 걸작’으로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바로 이런 순간이 우리를 감사의 사람으로, 또 희망의 사람으로 개화(開花)하도록 해주지요. “온 세상에 불이 꺼져 캄캄할 때에도,/내가 찾는 얼굴들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우리는 생각하는 갈대 끝으로/희망에서 불을 붙여 온다.//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때에도 /우리의 무덤마저 빼앗을 때에도/우릴 빼앗을 수 없는 우리의 희망!//우리에게 한 번 주어 버린 것을/오오, 우리의 신(神)도 뉘우치고 있을/너와 나의 희망! 우리의 희망!(김현승, <희망> 부분) 온 세상이 캄캄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도 ‘희망에서 불을 붙여’ 오는 사람. 도무지 감사할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사의 마음을 일으키는 사람. 이런 이의 영혼은 곧 ‘축복 받은 궁전’이며, ‘하느님의 가장 아름다운 집’(줄리앙 노르위치)입니다. 이제사 고백하자면, 나는 이 시를 읽다가 울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도무지 내일을 가늠할 수 없고, 어디에서도 희망의 싹을 발견할 수 없던 젊은 날. ‘오오, 우리의 신도 뉘우치고 있을/너와 나의 희망!’이라는 대목에서.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시인의 거룩한 긍정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샴쌍둥이만 같은 감사와 희망. 그렇습니다. 감사와 희망이 ‘깜깜한 하늘에 갇히면 별이 되어 먼 언덕 위에서 빛난다’는 것을 믿으므로. 고진하(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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