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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술과 성령

등록 2013-12-24 19:59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학 명예교수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학 명예교수
[종교의 창] 열린 눈 트인 귀
연말연시엔 술에 취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술에 취하면 보통 말이 많아진다. 그런데 ‘취중진담’이란 말도 있다. 오히려 술에 취했을 때 진짜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우리가 맹맹한 의식 상태에 있을 때 갖고 있는 이른바 ‘정상적 의식’이란 우리의 의식에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의식에 불과하다. 선생이면 선생‘답게’, 친구면 친구‘답게’, 모두 ‘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 사회에서 우리에게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역할이 무엇인가 알아내고, 거기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이 ‘정상적 의식’ 덕택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우리의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어느 면에서 볼 때, 이것은 일종의 가면(persona)을 쓰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 우리의 신분, 처지, 지위, 위신, 체면 등을 고려하면서 ‘척’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한 꺼풀씩’ 붙이고 다니는 셈이다.

이렇게 되니 정상적 의식을 가지고는 우리의 대인 관계에서 ‘진담’이 나올 기회가 거의 없다. 가면극에서 배우들이 제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쓰고 있는 가면의 역할에 따라 소리를 내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내 소리가 아니라 사회에서 얻은 ‘가면’에 맞는 소리를 내고 있을 따름이다. 가면과 가면이 맞부딪히는 삭막한 소리가 있을 뿐이다.

물론 맹맹한 의식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반드시 술만을 마셔야 되는 것은 아니다. 술 혹은 주정(酒精)을 영어로 ‘스피릿’(spirit)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다 알듯, ‘영’(靈) 혹은 ‘성령’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술과 성령은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는 이야기다. 둘 다 신나는 경험을 하게 한다. 둘 다 우리를 새로운 의식의 경지로 몰입하게 한다. 물론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술보다는 성령의 도움으로 이런 경지에 몰입하는 것이 더욱 확실하고 훌륭한 방법이라 본다.

흔히들 술을 마시지 않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꼭 막혀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번 틀어지면 맺힌 마음을 풀지 못한다는 뜻이다. 술의 작용도 모르고, ‘성령’의 역사하심도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 이런 막힘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내가 그래도 교인인데’ 하는 생각 때문에 가면이 한 꺼풀 더 두꺼워질 뿐이다. 이럴 경우 차라리 ‘한잔’하고 속 시원하게 풀어버리는 것이 맹맹한 상태에서 꽁하며 틀어져 있는 것보다 더 큰 미덕일 수 있을 것 같다.

칼이 그것을 쓸 줄 모르거나 옳지 못한 데 쓰려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물건이 되듯이, 술도 오용되거나 남용되면 위험하다.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두드려 부수고, 헛소리나 하기 위한 전주곡쯤으로 전락하면 주정뱅이들의 전유물에 불과하다. 조심할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모든 축복을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편 23:5)로 표현한 시편 기자처럼, 그것을 하나의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예수님도 사람들로부터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고(마태복음 11:19), 앞으로 아버지의 나라에서 우리와 함께 새 술을 마시는 날을 약속하기까지 했다(26:29).

오늘 크리스마스를 경축하는 의미에서 포도주 한두잔 나누며 서로 마음을 열고 ‘진담’을 털어놓는 여유를 갖는 것도 ‘안녕’하지 않은 요즘 조금이라도 우리의 숨통을 터주는 일이 되지 않을까?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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