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의 신’을 모신 일본 규슈 덴만구신사를 찾은 소년소녀들이 소원지에 시험을 잘 치게 해달라는 기도문을 쓰고 있다. 원철 스님 제공
[휴심정] 과거장(科擧場)과 선불장(選佛場)
꼭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작년 가을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험의 신’을 모셔놓은 규슈에 위치한 덴만구를 참배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일년에 수백만명이 찾는다는 가장 유명한 시험기도 전문 신사이다. 경내 뜨락에 설치된 긴 탁자 양쪽에는 귀밑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소년과 소녀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소원지에 합격하게 해달라거나 원하는 점수를 얻게 해달라는 기도문을 또박또박 한 글자씩 정성을 다해 열심히 적고 있었다.
본전 앞에 있는 매화만큼 유명한 청동으로 만든 소가 앉은 자세로 입구를 지키고 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845~903·뒷날 시험의 신으로 추앙됨)가 죽자 그 시신을 끌던 소가 이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할 수 없이 그를 여기에 묻었고 그 위에 신전이 지어지면서 비로소 신사의 역사는 시작된다. ‘영험 있는 소’를 만지고 문지르면 무난히 합격한다는 전설이 함께 전해져 온다. 이미 사람들의 손길을 탈 대로 탄 뿔과 코 부분은 유독 더욱 반질거렸다.
출가자에게도 시험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승가고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고시는 고시인데 관리를 뽑는 과거가 아니라 ‘붓다 후보’를 뽑는 과거장, 즉 ‘선불장’(選佛場)이다. 선불장이란 말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마조(709~788) 선사로부터 유래했다. 스님은 당시 과거장으로 가던 젊은이들의 발걸음을 선불장으로 향하도록 만든 일등 공신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출세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자기수행으로 인류의 정신적 스승이 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주변에 널리 설파한 까닭이다.
과거길 올랐다 방향 바꾼
단하천연 선사와 방거사
승과고시로 발탁된 구국 영웅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싱글’이 문화현상이 된 시대
또 하나의 대안적 삶으로
출가 세계에 관심을 가져보라 그것이 주효했던지 언제부턴가 젊은이들은 과거장이 아니라 선불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때는 관리를 뽑는 장소보다 부처를 뽑는 장소가 더 인기가 있을 정도였다. 물론 당시의 부패한 과거제도도 선불장 융성에 한몫했다. 시험을 치더라도 그것은 형식일 뿐 합격자는 이미 내정된 까닭이었다. 좌절한 과거 지망생들은 과감하게 발길을 돌렸다. 청년 수재(秀才: 뒷날 단하천연 선사)와 방온(龐蘊: 흔히 방거사로 불림)은 함께 과거길에 오른 ‘절친’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주막에서 만난 한 스님으로부터 선불장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마조 선사가 있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당나라의 선불장은 조선시대에는 승과평으로 불리기도 했다. 승과평이란 지명이 남아 있는 곳은 서울 강남구 봉은사 앞 코엑스 자리와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 입구 과수원 자리(현재는 공원)다. 조선 개국 이후 없어진 승과고시를 조선 명종 6년(1551)에 부활시킨 조선불교 중흥의 성지다. 이 시험에서 발굴된 대표적인 인재가 서산(1520~1604)과 사명(1544~1610) 대사다. 승과고시가 임진란의 구국 영웅을 발탁한 것이다. 봉은사의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에는 ‘선불당’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경남 합천 해인사 궁현당 역시 ‘선불장’ 현판을 달고 있다. 선불장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들이다.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는 시험에 수십번 떨어진 낙방거자였다. 그는 십년 이상 계속된 낙방 스트레스로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남들은 이르면 10대 후반, 늦어도 20대가 되면 벼슬길에 올랐는데 30대가 되어도 계속 학생 신분을 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고시 폐인’이었다. 그가 ‘마지막 응시’란 마음으로 과거길에 올라 경기도 안성 칠장사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다 말고 문득 마음에 섬광처럼 짚이는 것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종교의 힘을 빌리기로 한 것이다. 괴나리봇짐 속에 든 간식거리인 유과를 꺼내 법당에 공양물로 올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지극정성 기도를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그날 밤 꿈에 선신이 나타나 과거 답안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시험 제목은 ‘해질 무렵’(낙조)이었다. 잠에서 깬 뒤 꿈과 시험 제목의 일치 여부가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 모든 것이 꿈 그대로였다. 뒷날 사람들은 이를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라고 이름 붙였다. 시험 합격도 개인의 인생사에서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이후 암행어사로 활동하며 조선 사회를 맑히는 일에 일조를 더한 것은 더욱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시험이란 개인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사회를 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사가 만사라고 하지 않던가. 인재를 발탁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은 현재로서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그래서 시험이란 모두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불편한 것이지만 인류가 존재하는 한 절대로 없어질 수 없는 필요악(?)이 된 것이다. 결국 시험을 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말이다. 수능이 끝나고 대학 입시를 마쳤다 하더라도 결코 시험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작게는 운전면허부터 각종 자격시험, 크게는 입사시험과 승진시험, 심지어 노인대학 시험까지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사다. 더 이상 시험 칠 일이 없다는 것은 알고 보면 ‘완전한 퇴물(?)’이 됐다는 말과 동일하다. 따라서 시험 칠 일이 있다는 그 자체가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게 하는 증거인 것이다.
사회가 다양화되면서 시험도 다양화되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길을 따라가는 교과서적인 삶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자기 길은 자기가 만들어 갈 수 있다면 그건 더 좋은 일이다.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하는 것은 그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또다른 희열을 만들어준다. 잘 닦여 있는 출세를 위한 시험장의 탄탄대로를 가는 것도 물론 좋은 일이지만 산길처럼 울퉁불퉁한 선불장 길로 발걸음을 내딛는 것도 역시 아름다운 여정이다. ‘싱글’이 문화현상이 된 시대에 또 하나의 대안적 삶의 방식으로서 출가 세계에 관심을 가져본다면 이 또한 괜찮은 일 아니겠는가.
원철 스님(가야산 문수암 암주)
코와 뿔을 문지르면 시험에 합격한다는 전설이 있는 소의 상을 문지르고 있는 원철 스님. 원철 스님 제공
전통의식을 거행하고 있는 덴만구신사 전경. 원철 스님 제공
단하천연 선사와 방거사
승과고시로 발탁된 구국 영웅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싱글’이 문화현상이 된 시대
또 하나의 대안적 삶으로
출가 세계에 관심을 가져보라 그것이 주효했던지 언제부턴가 젊은이들은 과거장이 아니라 선불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때는 관리를 뽑는 장소보다 부처를 뽑는 장소가 더 인기가 있을 정도였다. 물론 당시의 부패한 과거제도도 선불장 융성에 한몫했다. 시험을 치더라도 그것은 형식일 뿐 합격자는 이미 내정된 까닭이었다. 좌절한 과거 지망생들은 과감하게 발길을 돌렸다. 청년 수재(秀才: 뒷날 단하천연 선사)와 방온(龐蘊: 흔히 방거사로 불림)은 함께 과거길에 오른 ‘절친’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주막에서 만난 한 스님으로부터 선불장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마조 선사가 있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당나라의 선불장은 조선시대에는 승과평으로 불리기도 했다. 승과평이란 지명이 남아 있는 곳은 서울 강남구 봉은사 앞 코엑스 자리와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 입구 과수원 자리(현재는 공원)다. 조선 개국 이후 없어진 승과고시를 조선 명종 6년(1551)에 부활시킨 조선불교 중흥의 성지다. 이 시험에서 발굴된 대표적인 인재가 서산(1520~1604)과 사명(1544~1610) 대사다. 승과고시가 임진란의 구국 영웅을 발탁한 것이다. 봉은사의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에는 ‘선불당’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경남 합천 해인사 궁현당 역시 ‘선불장’ 현판을 달고 있다. 선불장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들이다.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는 시험에 수십번 떨어진 낙방거자였다. 그는 십년 이상 계속된 낙방 스트레스로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남들은 이르면 10대 후반, 늦어도 20대가 되면 벼슬길에 올랐는데 30대가 되어도 계속 학생 신분을 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고시 폐인’이었다. 그가 ‘마지막 응시’란 마음으로 과거길에 올라 경기도 안성 칠장사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다 말고 문득 마음에 섬광처럼 짚이는 것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종교의 힘을 빌리기로 한 것이다. 괴나리봇짐 속에 든 간식거리인 유과를 꺼내 법당에 공양물로 올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지극정성 기도를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그날 밤 꿈에 선신이 나타나 과거 답안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시험 제목은 ‘해질 무렵’(낙조)이었다. 잠에서 깬 뒤 꿈과 시험 제목의 일치 여부가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 모든 것이 꿈 그대로였다. 뒷날 사람들은 이를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라고 이름 붙였다. 시험 합격도 개인의 인생사에서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이후 암행어사로 활동하며 조선 사회를 맑히는 일에 일조를 더한 것은 더욱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해인사의 선불장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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