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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당신도 진흙투성이 저 바닥으로 내려가세요

등록 2014-03-11 19:50

필자의 딸 고은비 화백이 하늘과 삶의 현장을 잇는 기도를 묘사한 그림.
필자의 딸 고은비 화백이 하늘과 삶의 현장을 잇는 기도를 묘사한 그림.
[휴심정] 삶과 마주하는 기도
유쾌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로 잘 알려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어릴 적 이야기다. 당시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의 작은 섬 크레타에 살았는데, 터키의 침략을 받아 그가 살던 작은 마을에도 잔인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다음날 아침, 그의 아버지는 겨우 여덟살배기 아들 카잔차키스의 손을 잡아끌고 학살의 현장으로 데리고 갔다. 커다란 대추야자나무가 있는 광장에 도착한 그의 아버지는 세 사람의 그리스인 사내들이 나뭇가지에 목이 매달린 채 죽어 있는 끔찍한 장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죽을 때까지 목이 매달린 이 사람들을 절대로 네 머릿속에서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 알겠지?” 아버지가 소리치자, 소년은 두려움으로 벌벌 떨며 물었다. “누가 그들을 죽였나요?” “자유가 죽였어!”

소년 카잔차키스가 놀라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아버지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자,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의 어머니가 소년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도대체 어딜 갔었니?” 소년이 울먹이며 말을 못 하자 그의 아버지가 대신 답변했다. “예배를 드리러 갔었소.”

이 이야기는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속에 나오는 실화다. 자식을 훈육하는 방식치고는 참으로 과격하다. 저절로 헉! 소리가 튀어나올 지경이다. 소설가의 아버지는 사람들이 생각해온 예배와 신에 대한 전통적 관념을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방식으로 전복시켜버린다. 억울하게 죽은 네 동족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죽은 그들의 발에 입 맞추는 것이 곧 ‘예배’라고!

카잔차키스는 목숨을 잃은
독립투사의 발에 키스했다
타고르는 먼지투성이 바닥에
신이 내려와 계신다고 했다
예수는 부자유에 고통받는
사람들 곁에 내려왔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은 뒤 소위 예배에 대한 고정관념이 부서졌다. 그리고 신에 대한 틀에 박힌 인식도 산산이 부서졌다. 너나없이 많은 종교인들이 엿새 동안은 자기 욕망의 부추김을 따라 세속적으로 살다가 ‘거룩한 장소’를 찾아가 불안한 영혼을 달래고 자기를 괴롭히는 죄의식을 덜어내는 일을 반복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하나의 타성으로 고착되면 그런 종교 행위가 곧 신을 모신 성스러운 삶이라는 착각 속에 살아간다. 자신의 심장을 뛰게 만들고 피를 끓게 하는 생생한 삶의 문제는 도외시한 채!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도 이런 나이브한 우리의 낡은 관념에 메스를 들이댄다.

“문마저 모두 닫힌 이 사원의 외롭고 어두운 구석에서, 당신은 누구를 예배하는 것입니까?/ 신께서는 농부가 팍팍한 땅을 가는 곳과 길 닦는 사람들이 돌을 깨는 곳에 계십니다. 그래서 그의 옷은 먼지로 뒤덮여 있지요. 당신의 신성한 망토를 벗어버리고 신처럼 당신도 먼지투성이의 저 흙으로 내려가세요.”(<기탄잘리 11> 부분)

시인은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내팽개친 채 성소를 찾고 성물을 숭배하는 행위에 대해 ‘눈을 뜨고 보라!’며 질타한다. 그렇다고 시인이 신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시인이 자기 시집에 붙인 제목 ‘기탄잘리’는 ‘신께 바치는 노래’란 뜻이다. 그토록 시인은 신을 사랑했지만 특정한 공간에 신을 가두는 것을 경계했다. 신이 특정한 장소에 매이게 되면, 우리의 삶은 그 순간부터 망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크고 화려한 외양을 뽐내는 교회나 사원들을 보라. 썩은 과일처럼 부패한 냄새를 풍기고 하나같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시인은 사원을 떠나 저 진흙투성이 삶의 바닥으로 내려가라고 권고한다.

예수 역시 제자들과 더불어 시간이 성화되는 황홀한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다. 어느 날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였는데, 예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그와 더불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광경을 목도한 제자들은 이곳에 초막 셋을 지어, 세 분을 모시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는 그곳에 머물고 싶어 하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을 내려와 부자유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삶의 바닥으로 다시 내려간다.

그러니까 예수는 그 황홀한 내적 명상이나 신비체험 속에도 빠져 살지 않았고 시인의 적절한 표현처럼 ‘창조의 속박을 스스로 기꺼이 떠맡’고 살았던 것이다. 타고르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바로 이런 대목에서 종교의 차이를 뛰어넘어 예수가 보여주는 삶의 진실과 깊이 만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자기만족의 종교 행위를 벗어나 신의 자비를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시인 역시 거기에서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먼지투성이 바닥으로 내려가라고, 그것이 진정한 예배라고 말하던 타고르는 님의 발이 머물러 있는 그 ‘깊은 곳’에는 내려갈 수 없다고, 솔직한 속내를 고백한다. “님에게 경배를 올리고 싶사오나, 저의 예배는 가장 가난하고 비천하고 길 잃은 사람들 속에 발을 쉬고 계신 그 깊은 곳에는 닿을 수가 없습니다.”(<기탄잘리 10> 부분) 본래 인간 내면의 결은 이토록 여리고 나약한 것일까. 하지만 성스러움에 뿌리내린 그 중심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닥에 있는 이들에 섞여 ‘발을 쉬고 계신’ 님의 자비의 숨결을, 시인은 뜀뛰는 가슴으로 느끼고 있으니까. 비록 소년 카잔차키스처럼 두려움과 고통을 무릅쓰고 죽은 자기 동족의 발에 입 맞추진 못할지라도. 영원히 푸른 청년 예수처럼 지치고 구멍 난 삶의 아픔이 있는 바닥으론 내려가지 못할지라도.

고진하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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