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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불편한 삶 자청한 정일우 신부님

등록 2014-05-20 19:34

김정대 신부 (천주교 예수회 사회사도직 위원장)
김정대 신부 (천주교 예수회 사회사도직 위원장)
나를 울린 이 사람
같은 예수회 소속의 정일우 신부님이 병중이다. 몇 가지 응급처치로 위중한 상태는 넘겼지만 지금도 병실 침대에 누워 마지막 삶의 순간을 동료 수도자와 간병인에게 의존해 보내고 있다.

신부님은 나보다 더 오래 한국에서 살았다. 1970년대 정부의 개발정책으로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밀려난 도시 빈민들과 청계천에서, 양평동에서, 성남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흥 신천리 복음자리에서 함께 사셨다. 신부님은 특별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삶을 나누었다. 신부님은 사람들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만나 삶을 나누었던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변했다. 그리고 변화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려고 노력하며 사회구조 개선 활동을 하였다.

난 1994년 1년간 서울 만리동 고개 근처의 조그만 집에서 신부님과 함께 살았다. 그 조그만 집에 각자 한 방씩 차지하고 살았는데 한때 우리는 여덟명이 함께 살았다. 그는 “가난함은 불편한 것이지만 그 작은 불편함이 우리를 사람이 되도록 한다”고 했다. 그래서 신부님은 “우리집은 적당히 불편해요!”라며 일부러 불편하게 사는 것에 익숙했다. 신부님이 있는 곳은 언제나 불편하긴 했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해 함께 음식과 삶을 나눴다. 이 집이 독립문 근처로 이사했고, 2002년도에 신부님은 시골에서 올라와 원장으로, 나는 집안 살림을 돌보는 당가로 다시 1년을 같이 살았다. 나는 남이 살던 그 집을 좀더 안락하게 꾸미려고 내부 수리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신부님께선 원치 않았다. “얼마나 화려하게 살려고 그러세요?” 난 신부님의 이 한마디에 계획을 수정해서 소박하게 내부를 수리했다.

신부님의 마지막 열정을 태운 시간은 농촌에서의 삶이었다. 1994년 늦가을쯤 신부님은 충북 괴산으로 내려가 약 7년을 농민들과 살았다. 나는 사도직을 하면서 갖게 되는 긴장을 풀러 신부님께 자주 갔다. 그는 남들의 마음을 들어주는 탁월한 청취자였다. 그리고 늘 각자의 삶과 열정을 지지해주었다. “정대, 너는 대단한 놈이에요!”라고.

정일우 신부님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예수회원의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그는 지금 철저히 남들에게 의지해서 살아야 할 정도로 가난하고 약해졌다. 그러나 신부님의 모습은 편안해 보인다. 그런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한 인간의 가난한 모습 앞에서 나조차도 겸손해진다.

김정대 신부 (천주교 예수회 사회사도직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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