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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흔적조차 사라진 바미안석굴에 밴 수행자의 향기

등록 2014-07-01 19:42수정 2014-07-01 21:14

2001년 탈레반의 폭격으로 대불이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린 바미안 석굴군.
2001년 탈레반의 폭격으로 대불이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린 바미안 석굴군.
[휴심정] 청전 스님 아프가니스탄 순례기
인도 히말라야 다람살라에 있는 거처를 떠나 지난 5월1일부터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 답사길에 나섰다가 우연히 아프가니스탄을 여행하게 됐다. 현장법사에 이어 길을 지난 마르코 폴로가 ‘워낙 높은 곳이라 하늘에 나는 새도 없었다’고 쓴 그 길을 따라갔다.

대영제국의 식민 시절에도 침략자들을 무수히 괴롭혔고 소련이 침공해도 끄떡없이 버텨내고, 칭기즈 칸의 원나라도 정복하지 못했지만, 9·11 테러 뒤 미국의 침공과 내전으로 쑥대밭이 된 그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간 것이다.

아무다리야강(옥수스강)의 최상류에 위치한 국경 초소 직원은 “6년 동안 여기 있었는데 한국인은 처음”이라고 했다. 힌두쿠시 설산이 둘러싼 파미르고원을 건너 정부군과 탈레반의 교전이 끊이지 않는 북아프가니스탄을 건넌 이야기는 몇날 며칠을 해도 다 할 수 없다.

아무다리야강 남으로 종일 달려 도착한 곳이 마자르이샤리프다. 이슬람교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사위, 예언자 하즈라트 알리가 여기에 묻혀 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고귀한 성소’(Noble Shrine)라 불리는 마자르이샤리프는 푸른 모스크(Blue Mosque)로 유명한데 그 빛깔과 양식은 아프가니스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에서도 제일이라고 한다. 성지 중의 성지라는 이곳까지 올 때는 진종일 수많은 자갈과 모래 무더기 사태를 지났는데 보름 전에 일어난 홍수로 2500여명의 사망자가 생기는 끔찍한 산사태가 일어나 아직도 흙더미 속에서 시체를 찾아내는 중이었다. 가끔씩 길가에 부서진 채로 방치된 탱크들의 잔해가 눈에 띄었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이래 현주민들이 육탄으로 탱크를 막았던 잔해였다. 막강한 군사력만 믿고 침공을 감행했던 소련은 피해만 잔뜩 입히고 또 자기들도 국제적인 조롱거리가 되어 10년 뒤 아무런 성과도 없이 철수했다. 그 자리를 대신한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자기들이 원조했던 탈레반 정권을 쫓아내고 꼭두각시 정권을 세워두었으나 얼마나 오래갈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태인 듯 보인다. 어찌 되었든 찾아간 마자르이샤리프의 담청색 돔과 자그마한 타일들로 이뤄진 푸른 모스크에는 참배객이 그치질 않았다. 동서남북 네개의 문 주위에는 하얀 비둘기만 모여 있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넘어가는 파미르고원 설산.
중앙아시아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넘어가는 파미르고원 설산.

파미르 고원을 넘어
무슬림 성지에 이어 닿은
바미안 석불
종교적 편협성으로
끊임없이 파괴된 현장 속에서
파괴되지 않고 이어져
내 가슴에까지 전해진 진리

이곳은 또한 헬레니즘의 중심지인 알렉산더 동방 원정 때 건설된 알렉산드리아라는 인공 도시의 그리스인들이 이주해 와서 살던 곳으로 그들의 후예에 의해서 인간의 형상을 본떠 맨 처음 불상이 제작되었다. 그들과 통혼(通婚)을 했던 남쪽의 간다라 지방의 월씨(月氏)의 후예 쿠샨 왕조에 의해서 불상이 탄생되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감회가 남다를 줄 알았으나 ‘발라 히사르’라 불리는 진흙 담만이 무상의 이치를 일깨우며 남아 있었다.

발흐를 굳이 찾아가 보고 싶었던 또다른 이유는 바로 이곳이 ‘불을 숭배한다’는 배화교(拜火敎)의 창시자 조로아스터(자라투스트라)의 태생지였기 때문이었다. 부처님보다 100여년이 앞선 시대에 태어난 그의 가르침은 이후 페르시아, 즉 오늘날 이란에서 크게 번성했다. 그의 가르침의 근거는 선악으로 나뉜 최초의 이원론적 일신교 사상으로 그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종교는 두말할 것 없이 지금의 기독교와 회교다. 한때 중국까지 전래되어 명교(明敎)라 불리던 배화교는 지금도 내가 사는 인도 땅에 남아 있다. 인도 제일의 타타그룹의 회장도 배화교도이다.

발흐를 뒤로하고 이제 대불(大佛)로 유명한 바미안으로 향했다. 그런데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홍수로 유실되어 ‘산 넘고 물 건너’ 갈 수도 없었다. 결국 고심 끝에 국내선 비행기로 카불로 갔다가 거기서 바미안으로 가는 우회로를 택했다.

바미안 석불은 2001년 탈레반이 폭파해버려 대불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그냥 휑한 감실만 남아 있었다. 두 큰 불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하나는 55m이고 다른 38m의 불상은 완전히 지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이 두 대불 이외의 무수한 석굴과 그 안의 불상들도 사격연습용 표적으로 삼았다고 한다.

파미르고원 산골마을에 사는 아프가니스탄 노인과 청전 스님.
파미르고원 산골마을에 사는 아프가니스탄 노인과 청전 스님.

7세기에 중국의 현장법사는 이곳을 지나면서 10개의 큰 사원과 1000명이 넘는 승려들이 수행하고 있다고 적었고 우리 신라의 혜초 스님도 여기를 다녀갔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몽고의 침입과 이후 회교가 융성한 이후 바미안은 수난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17세기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는 아예 불상의 얼굴을 떼어내버렸고, 그 100년 뒤에는 큰 불상의 한쪽 다리도 부숴버렸다. 쿠샨 왕조, 간다라 예술의 정수로 불리던 이 문화유산은 편협한 종교인들에 의해 끊임없이 파괴되었다가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나 탈레반이 이미 그 흔적마저도 없애버린 뒤였다.

모든 생겨난 것은 반드시 부서지는 법, 연기법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이 대불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막상 눈앞의 텅 빈 감실을 보니 착잡한 마음 가눌 길이 없었다.

고도가 높아서인지 5월인데도 바람이 꽤 찼다. 감실들은 안에서 안으로 교묘히 계단이 만들어져 있어 서로 이동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한 석굴 안에서 앞의 설산이 보이는 곳에 앉아 그 옛날의 이곳 고행승들을 그려보았다. 그들이 지금처럼 먹을 것이 넘쳐나는 온갖 풍요와 편리를 누렸을 리가 없다. 수행보다는 개인의 명리와 안일에 빠져 놀고먹는 피둥피둥 살진 무리였을 리도 없다. 가진 자와 결탁해 일신의 안일만 도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도 가고,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무상 속에서도 한순간 한순간 진실의 발걸음을 옮긴 수행자들의 삶이 지금 내 가슴에까지 흐르고 있다. 그것이 목숨을 걸고 내 발길을 끈 것이기도 했다. 글·사진 청전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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