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과 깸
4월 말, 바람 차던 그 밤, 대학 동창 모임 약속이 있었다. 졸업 뒤 처음 만나는 반가운 자리였다. 그 모임 회장으로 연락을 돌린 게 나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오르는데, 휴대전화에 낯선 번호가 떴다. 장례를 알리는 부고였다. 창수 딸이다.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았다가 축 처진 몸으로 올라온 아이다. 그 날 밤 나는 문상을 가지 못했다.
창수를 처음 만난 건 스무살 어느 날이다. 그는 내 친구의 자취방 룸메이트였다. 그는 트럭을 몰았고, 나는 대학에 다녔다. 우리는 그 누추한 방에서 새우깡을 펼쳐놓고 술을 마셨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는 아빠가 되었고, 나도 아빠가 되었다. 그리고 연락이 끊겼다.
유학하고 돌아와 어느 철공소 많은 동네 교회 주일학교 목사로 있을 때, 전화를 받았다. 창수였다.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 연락했단다. 어떻게 사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안산에서 딸과 둘이 산다고, 요즘 많이 힘들다고, 그래서 교회도 다니기 시작했다고, 자기 친구 중 목사 된 녀석 있다고 자랑하고 다닌다고.
그리고 다시 연락이 끊겼는데 8년 만에 딸의 장례를 알리는 부고장이 왔다. 그런데도 가지 못한 건 겁이 나서였을 것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분노와 슬픔을 위로하기가 두려웠던 거다. 눈물의 바다에 같이 빠져 숨이 막혀 버릴까 무서웠던 거다. 그래서 외면하고 싶었던 거다.
구약성경 전도서엔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란 구절이 있다. ‘학대하는 자’는 누구일까?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돌려본 적이 있다. 그리고 깨달았다, 사람이 두렵다는 것을. 왜 전단지 돌리느냐며 매섭게 다그치는 사람이나 받은 종이 박박 찢어 바닥에 내치는 사람이 두려운 게 아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두렵다. 내미는 손길 무시하고 자기 길만 열심히 가는 사람이 두려운 거다. 전도서가 말하는 ‘학대하는 자’는 이런 외면하는 학대자를 말하는 게 아닐까.
창수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그를 만났다. 세월호 생존자 회복 캠프에도 도우러 갔었다. 단원고 아이들이 여의도로 걸어올 때 마중 나갔다. 유가족들이 국회에서 농성할 때는 하룻밤 곁을 지켰다. 가족여행 때는 팽목항에 다녀왔다. 목회자들과 광화문광장에서 철야기도도 했다. 40일 단식하시던 목사님들께 아이들 데리고 문안도 다녀왔다. 찬바람 맞으며 광화문 기도회에서 설교도 했다. 나는 매일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세월호를 말한다. 왜냐면 미안해서, 그날 못 가서, 아니 그날 안 가서, 그날 내 마음에 기어오르던 외면하는 학대자의 마음이 너무 미안해서다.
세월호 유족들이 청와대 앞 농성장에서 철수했단다. 결국 대통령은 유족들을 외면했다. 특별법이 통과됐다. 결국 국회의원들은 유족들을 외면했다. 창수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그리고 말해야겠다. 미안하다고. 학대해서 미안하다고. 외면해서 미안하다고. 그러나 다시는 외면하지 않겠다고.
남오성 목사(일산은혜교회)
남오성 목사(일산은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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