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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산중 설전

등록 2015-01-20 19:51

쉼과 깸
지난해 끝자락, 예비 고3을 위한 템플스테이를 마친 날, 오후부터 산중에는 눈이 하염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붉은 동백 한 송이 곁에 두고 그 무위의 군무를 바라보며 홀로 자연의 신묘한 경지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때 한 가족이 예고 없이 불쑥 암자를 방문했다. 서른 해 가까이 인연이 있는 불자다. 대흥사 녹아차를 나누면서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한담을 나누었다. 자녀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 이 부부를 알았는데 그날은 초등학교 다니는 손주를 데리고 왔다. 세월의 빠름을 새삼 느끼며 “참 세월은 어찌할 수 없네요, 보살님도 많이 늙으셨어요”라고 운을 떼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분의 얼굴이 굳어졌다. 몹시 서운한 표정이었다. 순간, 세상 사람들과 살아가는 방법이 서투른 내가 또 무슨 실수를 했구나 싶었다. “아니, 스님, 어떻게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 늙었다니요. 늙어가는 것도 서러운데 아무리 스님이라고 제 자존심을 무시해도 되는 겁니까?” 아! 이것 때문이었구나, 뭐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내심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큰 문제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보살님, 왜 늙어가는 것이 서럽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스님은 늙고 추한 모습이 좋아 보이십니까?”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늙은 모습은 ‘추하고’ 늙어가는 것은 ‘서럽다’는 생각은 보살님의 생각입니까,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요, 하여튼 저는 속상해요. 젊은 사람을 보면 부럽고 지금의 저를 보면 억울하고 그래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자책했다. 아니 나에게 3년 동안 불교 교리를 배우고 수행 프로그램에도 더러 참여했던 분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그래서 작심하고 많은 시간 그분과 밤늦도록 즉문즉설을 나누었다. 그날 내가 말한 요지는 이런 거였다. 청년 싯다르타는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왕위를 버리고 출가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는 그 고통에서 해탈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탈은 생로병사를 피해가는 그런 해탈이 아닙니다. 부처님도 늙고 죽음을 맞았습니다. 부처님은 말년에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제 늙었고 쇠락했다. 마치 낡은 수레와 같다.” 부처님의 해탈은 늙음과 죽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꾸고,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불안과 집착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잘못된 생각이란 모든 것이 불변하고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어떤 원인과 조건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은 반드시 늘 변하고 있습니다. 몸도 그렇고 생각과 감정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고 하지 않습니까. 늙음이 추하고 서럽다는 생각은 정당한 것이며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과거 젊음과 쾌락에 대한 집착으로 그리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요? 그리고 노년은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따라 빛나는 오늘의 축복일 수 있습니다.

 법인(일지암 암주)
법인(일지암 암주)
다음날 집으로 돌아간 그분께 나는 키케로의 말을 인용하여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세월이 정말로 젊은 시절의 가장 위험한 약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해준다면, 그것은 세월이 우리에게 주는 얼마나 값진 선물인가.” 노년이 노년을 두려움과 경멸로 여긴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경멸하는 것이다. 삶은 지금 여기 나의 생각으로 늘 새롭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법인(일지암 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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