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불교 용수 스님
서울 종로구 경운동 불교영어도서관에서 티베트불교 명상을 가르치며, 티베트 영적 스승들을 초청하는 용수 스님.
선교사하며 독실한 모르몬교도 성장
유타대에서 달라이라마 강연 듣고
티베트불교에 관심. 네팔서 만난
페마 왕겔 린포체에게 출가해 수행
매년 티베트불교 영적 스승들 초청
불만족 이기고 평화 얻는 명상법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약사인 아버지를 따라 아홉살 때 미국에 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가 세살 때 헤어졌다. 그는 그때부터 친모의 손을 떠나 아버지를 따라 살았다. 미네소타주에서 2년간 살다가 유타주 주도 솔트레이크시티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아버지를 따라 모르몬교도가 됐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2년 동안 모르몬교 선교사로 활동할 만큼 독실한 모르몬교도였다. 이어 유타주립대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고, 작은 방송국에서도 일했던 그는 어느 날 유타대에서 달라이라마의 강연을 듣게 된다. “그때는 달라이라마가 누군지도 몰랐다. 다만 머리에 뭐 좀 든 지식인들이라면 거기에 다 간다고 하길래, 거기 가면 뭔가 있어 보이지 않을까 해서 간 것이었다.” 당시엔 그것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고 말았다. “강연에서 달라이라마는 두가지를 얘기했다. 먼저 ‘자비심이 자신한테 좋다’고 했다. ‘자비심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한테 이익’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하려면 자비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두번째는 ‘우리 모두는 다 같다’는 것이었다. 누구를 만나든, 나랑 똑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가 변했다. 자비심이 커졌고, 타인을 경계하는 대신 마음이 열려 친밀해졌다. 그는 그때부터 티베트불교에 대한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히말라야에 있다는 티베트불교의 수행자들처럼 산에 홀로 머물고 싶고, 수행도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북캘리포니아의 티베트명상센터에 들어가 요가도 하고 단식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승려가 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명상에 잠겨 있던 어느 날 밤 한순간에 ‘승려가 되어야지’라며 온 존재에 가득 차는 확신이 밀려왔다. 그 뒤로 지금까지 그 마음이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그날 밤 밖에 나가 달을 보면서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달라이라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니 자신의 스승은 달라이라마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루가 급했다. 달라이라마를 만나러 가기 위해 그의 소재를 수소문하니, 인도 보드가야(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성지)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인도로 가는 비행기 표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네팔 카트만두를 경유하기로 했다. 카트만두공항에서 호객꾼이 소개한 호텔에 갔다가 너무도 더러워 기겁을 했다. 다음날 관광을 시켜주겠다는 그 호객꾼을 따라 최대 불탑이 있는 보우다나트에 갔다가 세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들르게 됐다. 정원까지 갖춰진 그곳은 처음 간 호텔에 비하면 낙원이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 식사를 할 때도 그는 미국에서부터 가져와 한시도 떼놓지 않던 애독서 몇권을 상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한 외국인 스님과 함께 식사 중인데 한 티베트불교 스님이 들어왔다. 첫눈에 마음이 끌리는 분이었다. 그분을 만나고는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런데 그분이 바로 그가 소장하고 있던 그 저서들의 불교 출판사 대표였다. 그가 읽었던 수많은 티베트불교 서적 가운데 바로 그분이 쓴 저서만을 골라 그가 들고 그곳까지 간 것이었다. 알 수 없는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분이 바로 그의 은사가 된 페마 왕겔 린포체였다. 그는 달라이라마가 있는 보드가야행을 포기하고, 페마 왕겔 린포체 곁에서 출가자가 되었다. 이어 스승이 남프랑스 도르도뉴에서 운영중인 무문관에서 2003년 5월부터 2007년 5월까지 꼬박 4년간 머물렀다. 첫 1년간 예비수행을 마치고 본수행에 들어가 족첸·마하무드라 등 티베트불교의 주요 수행을 거쳤다.
용수 스님이 5월5~11일 방한할 티베트불교 밀교 최고 스승인 사캬 티진 존자의 사진을 향해 합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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