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과 깸
단숨에 강론을 써내려가는 신부가 몇이나 될까. 고개를 숙이고 주보를 뒤적이거나 아예 조는 신자를 본 후라면 더 그럴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집중하게 할까 궁리하기 마련이다. 나의 형편도 비슷하지만 나름의 사정이 하나 더 있다. 낱말 몇 개에도 자주 한참을 더듬거린다. 정의, 사랑, 평화 따위의 추상적 개념어일 때 그렇다. 장고는 그 말들의 무게 때문이기도, 뜻을 온전히 몰라서이기도 하다. 감히 무게 때문에 더듬거리고, 내 손에 쥐어지지 않는 남의 것 같아서다. 말로 먹고사는 시인이 정작 말에 인색한 까닭도 여기 있겠다.
이런 유의 단어들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곳은 당연지사 교단과 설교대다. 으레 사용되는 말들이니 부담 없고 거슬릴 일도 없다. 부담이 없으니 뜻도 없다. 불행스럽게도 그것은 어떤 패턴, 형식일 뿐이다. 수려하지만 결국 말 더듬는 시인의 진심과는 비교되지 않는 뜻 없는 일종의 운율, 맹탕의 소리일 뿐이다.
얼마 전 로마를 다녀왔다. 공항부터 도심으로 이어지는 도로변 입간판까지 순례객을 환영하는 광고가 쉽게 눈에 들어왔다. 속내는 이랬다. 경기불황에 지난해 말 교황이 선포한 자비의 희년으로 모처럼 관광객이 늘어날 것이라 기대한 때문이다. 물론 파리 테러로 단꿈도 잠시였지만, ‘자비’라는 이 매가리 없는 단어가 도심 곳곳에 걸려 있는 모습은 그것으로 장관이었다. 누가 이 무력한 낱말을 온 천지가 볼 수 있는 광장으로 꺼내 올 수 있었을까. 과연 누가 이 하찮고 잊혀도 그만인 것을 다시 떠올리게 할 수 있었을까!
말의 진심은 대개 그 수식이 아니라 화자의 삶에 달려 있다. 교황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다시 끄집어낸 말들 때문이다. 난민들을 집어삼킨 람페두사 해안에서 물에 젖은 연민을 건져 오고, 국경을 넘다 사라진 넋들 곁에서 자비를 주어왔다. 이 이역의 땅에서조차 모두 잊자 하던 바다 속 어린 영혼들을 고통이란 이름으로 한사코 건져낸 이다. 그의 말은 땅과 사람에게 가 닿고 든든히 뿌리내려 있다. 동동거리는 발이, 보듬는 팔이 달린 말이다. 아름답고 귀한 말이다. 몸통 없는 허깨비 말들은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문학은 하나의 도덕률을 강화하려 할 때조차도 자주 그 도덕률의 밑바탕을 뒤흔든다. 문학은 그렇게 주어진 윤리의 바깥으로 빠져나가 그 윤리가 내팽개쳤던 사람들을 위해 노래를 만들고 이야기를 만든다.”(<우물에서 하늘 보기>)
황현산 선생이 정의하는 문학의 문학다움, 숭고함이다. 그렇다. 잊어도 그만인 낱말들을 다시 세상 한가운데로 옮겨놓은 그의 재주는 단지 말주변이 아니라 숭고함 때문이다. 있어도 형식으로만 남아 아무 뜻도 품지 못하는 무용의 낱말들을 다시 꺼내 씻기고 살을 붙여 이름을 새겨준 숭고함 말이다. 문학적 은유쯤으로 전락한 가난을 변두리 인생의 그것으로, 평화와 연민이라는 관념을 위태로운 목숨들이 넘는 저 어둑한 국경선으로 끌어내린 것은 다름 아닌 몸을 지닌 그의 말이다. 과장도 에둘러감도 없는 이 직설만이 그의 말을 가장 문학답고 가장 숭고하게 만든다.
때가 때인지라 몸통 없는 말들이 난무한다. 더듬거려야 한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시인의 말더듬을 배울 때다. 제 말의 무게를 진심으로 감당하고 두려워할 때다. 말은 본디 소리가 아니라 뜻을, 사람을 담기 위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장동훈(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장동훈(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