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커밍아웃 뒤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의 두 주인공인 비비안(왼쪽·활동명)과 나비. 비비안은 동성애자 인권을 상징하는 색의 목걸이를, 나비는 트랜스젠더 인권을 상징하는 색의 목걸이를 걸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엄마들이 다시 태어났다. 새로운 정체성, 삶을 얻었다.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로 태어난 나비(활동명) 정은애(58)씨는 4살, 비비안(활동명) 강선화(52)씨는 5살이다. 34년 차 소방 공무원 정씨는 몸과 법적 성별을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꾼 트랜스젠더 한결(27)씨의 엄마다. 남성 동성애자 예준(26)씨의 엄마 강씨는 27년 차 항공 승무원이다. 한결씨와 예준씨 곁에서 엄마들은 걸음마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천천히 아이와 아이를 둘러싼 세계로 난 길을 걸었다. 자식의 커밍아웃을 겪은 두 엄마의 여정과 성장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이 17일 개봉했다. 지난 16일 서울시 동작구의 한 영화관에서 <한겨레>가 정씨와 강씨를 만났다.
“국제선을 오가며 수많은 게이 커플을 마주하면서도 내 아들이 게이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어요.” 강선화씨는 2016년 예준씨가 쓴 편지를 받아들었다. 아이의 ‘커밍아웃’은 강씨가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처음엔 머리로 애를 썼다. 동성애자란 아이의 정체성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2∼3년이 지나서야 애쓰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강씨는 자신을 “편견 없고 차별 않는 선량한 시민”이라 여겼다. 그 선량한 시민은 성소수자 인권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한 방송인이 커밍아웃 뒤 하루아침에 방송에서 사라질 때도 ‘왜 저 사람이 사라져야 하지?’란 의문이 아니라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아이의 커밍아웃 뒤에야 다양함에 대한 이해가 생겼다.”
정은애씨는 한결씨가 어렸을 때부터 성소수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한결씨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알게 된 건 2017년 성소수자부모모임에 처음 갔을 때다. 정씨는 “레즈비언 한결의 엄마”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한결씨는 이 말을 바로 정정했다. “저는 트랜스젠더입니다”라고. 그때야 정씨는 수술을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뒤 그는 한결씨가 성별을 바꾸는 여정에 동참한다.
엄마들은 몰라서, 미숙해서 때때로 아이에게 상처를 줬다. 중학생인 한결씨는 “가슴이 없었으면 좋겠다”“남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여성이 성차별적 사회에서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남자가 되고 싶다고 하는 건 비겁한 일이야.”라고 정씨는 받아쳤다. 한결씨와 정씨 사이에 놓인 마음의 문이 쾅 닫혀버렸다.
“엄마가 힘든 인생 살게 해서 미안해.” ‘저는 남성 동성애자입니다’로 시작하는 편지를 받고 강씨는 예준씨에게 사과를 했다. 성소수자 인권을 고민한 적 없던 강씨는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줬다. “이 말을 위로랍시고 했어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을요. 나의 잘못도, 너의 잘못도 아니고 이 사회가 잘못된 거란 얘기를 해야 했는데….”
엄마도 자란다. 아이의 커밍아웃을 받아들이면서 더해진 ‘성소수자 부모’란 정체성은 엄마들을 성장시켰다. 강씨는 안주하는 삶을 뒤로 했다. 20년 넘게 항공사란 익숙한 조직 안에 녹아있었다. 그런 그가 성소수자 부모가 되어 맞닥뜨린 낯선 세계는 ‘다양성’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려줬다. 성소수자부모모임에서 2016년부터 인권운동을 하고 강씨는 “관계를 맺는 방법부터가 달라졌다”고 했다. “처음 모임에 가면 존중에 대한 교육을 받는다. 나이에 상관없이 존댓말을 써야 한다거나, 본인이 얘기하지 않는 한 사적인 질문을 하면 안 된다는 내용 같은 아주 기본적인 교육이다. ‘우리 모두는 동등하다’는 개념을 체득하면서 직장 후배들과도 수평적인 관계 맺기가 가능해졌다.” 상급자가 되면서 그만뒀던 회사 노조에도 다시 들어갔다. 지난해엔 간부까지 맡았다. 강씨는 침묵하는 다수에서 목소리를 내는 소수가 되기로 했다.
하루하루 자라는 기분이라는 정씨. 그가 성소수자 부모가 되어 겪은 가장 큰 변화와 성장은 한결씨와의 관계 그 자체다. 어쩔수 없이 혈연으로 이어진 부모·자식 관계가 아닌, 진심으로 서로를 믿고 응원하는 사이가 됐다. 그리고 이제는 한결과 같은 꿈을 꾼다. “아이가 적극적으로 더 좋은 어른이 되라고 채찍질을 해줘요. 이제는 저를 믿고, 저에게 기대하게 된 거죠. 처음에는 감당하기 힘들었는데 그 과정이 한결이란 사람을 알아가는 시간이 됐고, 더 나은 사회를 꿈꾸게 되는 계기가 됐어요.”
성소수자부모모임(부모모임)은 두 엄마가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2014년 2∼3명의 자조모임으로 시작해 지금은 120명이 넘는 회원이 있다. 강씨는 “아들의 커밍아웃 사실을 아무데도 말하지 못하고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할 때였다. 처음 모임에서 이 사실을 밝히고 나니까 왜 당사자들이 커밍아웃을 하고 싶어하는지 깨달았다. 커밍아웃의 뜻은 ‘벽장에서 나온다’는 의미인데, 그 벽장이 얼마나 어둡고 답답하겠나. 부모모임은 저에게 내 벽장의 문을 스스로 열고 나오게 만들어준 소중한 존재다”라고 했다. 정씨는 “지금은 성소수자인 자식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적 소수자나 약자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성소수자 부모’라는 사회적 소수자가 되어보니 다른 소수자·약자들이 보였다. 자식들이 일반적인 40~50대 인식에 머무른 부모의 세계관을 확장해준 것”이라고 했다.
아이의 커밍아웃 뒤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의 두 주인공인 비비안(왼쪽·활동명)과 나비가 영화 포스터 앞에 섰다. 영화는 17일 개봉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성소수자에게 향하는 혐오와 차별의 시선도 직접 경험하곤 한다. 한결씨가 이번 정부에서도 차별금지법이 미뤄지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자, 정씨는 “설마 대통령이 인권변호사 출신인데 그렇게 되겠어?”하고 다독였다. 아들은 울부짖으며 말했다. “엄마, 나는 언제 어디서든 길 가다가 돌에 맞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어.” 그 말을 실감하게 된 건 2018년 열린 인천 퀴어문화축제에서였다. “욕을 듣고, 옷이 찢기고, 맞고…. 물리적 폭력을 직접 당하면서 한결이의 삶이 죽음의 경계에 있다는 걸 느꼈어요. 특히 올해 고 변희수 하사님의 죽음, 트랜스젠더 숙명여대 입학 포기 등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그럼에도 꿋꿋이 버텨라’는 말을 할 수가 없더라고요. 부디 이 영화가 개봉될 때 아이와 함께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바람밖에 없었어요.” 오는 20일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트랜스젠더를 향한 폭력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기리는 날이다.
‘너에게 가는 길’ 위에서 한발 한발 힘겹게 걸음을 뗀 엄마들은 이제 훌쩍 자라 오래, 멀리 뛸 준비를 한다. 정씨는 “내 아이의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앞으로도 더 나은 어른이 되기 위해 배우고, 목소리를 내겠다”고 말했다. 강씨는 아이에게 이 말을 꼭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엄마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줘서 고마워. 이제 세상을 바꾸는 건 엄마가 할게. 너는 자유롭게 네 인생 즐기며 살아줘.”
박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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