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 목 뽑곤 “애기 죽었네”…자존감 잃고 정서장애 ‘늪’
“그 아저씨가 빨리 잡혀 감옥에 갔으면 좋겠어요. 식칼로 그 아저씨를 내리찍고 싶어요.” 선혜(가명·초등 3년)가 성폭행을 당한 뒤 겪은 아픔은 죽음 이상이었다. 지난해 여름 부모 손에 이끌려 서울 시내의 ㅊ성폭력상담소를 찾은 선혜는 끔찍한 말들을 쏟아냈다. “혹시 친구들이 알면 나보고 더럽다고 할까봐 두려워요.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선혜는 부모님 심부름을 가던 중 길을 묻는 한 중년 남자에게 이끌려 인적이 없는 건물로 따라들어갔다가 성폭행을 당했다. 범인은 흉기로 협박하며 온갖 행위를 강요했다. 어머니가 경찰에 신고했지만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이후 아이는 떨쳐낼 수 없는 기억 때문에 혼자 잠도 못 자고, 범인과 같은 연배의 남자만 봐도 깜짝깜짝 놀라며 두려움에 떨었다. 범인에 대한 분노와 “그 사람을 따라가지 말아야 했는데 …”라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표정이 얼어붙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가 자주 찾아왔다. 윤희(가명·4)가 처음 ㅎ상담소를 찾았을 때도 상담원은 하얗게 질려있는 아이를 보고 마치 마네킹이 들어오는 줄 알았다고 한다. 아이는 인형을 가지고 놀다 목을 뽑아버린 뒤 “죽었네, 우리 애기가 죽었네” 하며 즐거워하다, 다시 목을 뽑았다 붙였다 반복했다. “아저씨가 날 잡아가서 죽어서 감옥에 갔는데 다리가 다 찢어졌어요” 하며 혼자 노래를 부를 때는 듣는 이들이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 이처럼 아이들은 성폭력을 당한 뒤 자존감을 잃고 동무와도 제대로 놀지 못하는가 하면, 심할 경우 동무와 성관계를 갖는 등 갈수록 깊은 정서적 장애의 늪으로 빠져든다고 전문가들은 전한다. 치료가 절실한 이유다. 심리학 등을 전공한 석·박사 10여명으로 구성된 ㅊ상담소 상담원들과 만나 심리치료를 진행하면서, 선혜는 차츰 늪에서 헤어나기 시작했다. 상담원들은 “그 사건은 네 잘못이 아니라 사고였다”며 아이의 분노, 두려움, 불안감을 달랬다. 치료는 일주일에 한차례씩 만나 주기적인 대화를 하고, 더 어린 아이들은 놀이나 미술치료를 함께 한다. 처음에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조차 꺼리던 선혜가 서서히 마음을 열어갔다. 하지만 아이가 던지는 말들은 여전히 어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부모 무관심에 상담소 부족 ‘치료 사각지대’ “마음의 무게가 있다고 생각하면, 내 마음의 무게는 천근만근이에요.” “당하면서는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왜 하필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냐고 생각했어요.” “이제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주니 마음이 가뿐해지네요.” 윤희도 미술치료와 모래놀이 등 놀이 치료를 받으면서 “누가 나 성폭행했어요”라며 자신의 심리적 상처를 말할 수 있는 단계까지 호전됐다. 1년 가량 꾸준히 치료를 받은 뒤에야 일상 생활에 지장이 없을 만큼 호전됐다. 선혜도 여섯달 가량 상담이 진행된 뒤 지난달 치료를 끝냈다. 여러 후유증이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상담원들은 “언제든 증상들이 재발할 수 있고, 다른 형태로 반복될 수 있다”며 지속적인 관심을 당부했다. 피해 어린이의 치료는 이처럼 중요하지만 치료에 대한 인식 부족과 치료기관 미비로 고통속에 놓여있는 아이들이 많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의 활동가 정하경주씨는 “어린이 성폭력 피해자의 10% 정도만이 수사기관에 신고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며 “이처럼 사건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다 보니 범인 처벌은 물론, 피해 어린이의 치료도 제대로 안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아이를 상담소에 데려다줄 부모가 없거나 맞벌이로 시간을 낼 수 없어 치료를 포기하기도 하고, 심지어 학원시간과 겹친다는 이유로 상담을 포기하는 부모도 있다고 한 상담원이 전했다. 정부가 운영하는 치료기관인 해바라기센터는 서울과 대구, 광주에 각각 한곳씩 있는 게 고작이다. 민간 상담소에 대한 지원도 턱없어, ㅊ상담소의 경우 상담원 세 사람분 급여가 고작이다. 그나마 고급인력인 이들의 급여는 100만원 이하에 머물러 있다. 인력부족 탓에 이 상담소에서는 피해 어린이가 석 달 넘게 치료를 기다려야 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극단적인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관심조차 가져주지 않는 어른들의 무관심 속에, 성범죄에 희생된 어린이들은 아픈 상처를 달랠 곳조차 찾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선혜와 윤희가 무사히 치유된 것은 다행이다. “이제는 밤에 잠이 밀려온다. 나도 이제 평범해진 것 같다.” 선혜의 말처럼, 악몽을 겪은 모든 아이들이 다시 예전의 예쁜 꿈을 꿀 수 있게 돕는 건 조금도 늦출 수 없는 일이다. 박용현 조혜정 전진식 기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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