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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재성, ‘지금, 여기’를 영어권에서는 ‘히어 앤드 나우’(Here and now)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단어 순서를 한국어 순서대로 ‘지금, 여기’로 바꾸면 ‘나우 앤드 히어’(Now and here), 여기서 앤드(and)를 뺀 두 단어를 붙이면 ‘노웨어’(nowhere, 아무 데도 없다)가 됩니다.
즉, 나의 현재성에 머무른다는 것은 아무것, 아무 곳, 즉 과거에도 미래에도 매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웨어가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것이라면 실은 ‘에브리웨어’(everywhere), 즉,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유로움, 자재(自在)함이지요.
나 자신의 ‘지금, 여기’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는 그 뜻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아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누구나 젊었을 때는, 그리고 대체로 50대까지는 여전히 신체·정신적으로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사회생활에서 얻은 능력, 성취, 지위를 나 자신과 동일시하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할 기회를 좀처럼 갖지 못하지요.
그런 와중에 은퇴와 노화를 겪으면, 사회적 성취의 한계와 정신·육체적 한계를 절감하면서 무력감에 빠집니다. 그리고 심한 혼란과 깊은 우울을 겪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누구도 어쩔 수 없고 저항해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는 그 법칙, 무상함이 막상 내게 닥쳐오니 당혹스럽고 불안합니다. 입고 있던 옷이 한겨울 삭풍에 날아가버리고 나는 벌거벗은 채 광야에 홀로 서 있는 듯합니다.
이렇게 정체성의 위기를 겪으면서 비로소 다음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내가 성취한 것, 내가 받은 인정과 대우, 그 모든 것이 나를 떠난 지금, 여기 남아 있는 나는 누구인가?” 저는 이미 과거는 다 지나갔다는 현실을 직면하고 받아들이고 편안해지고 또 심지어는 환영할 수 있기까지 몇년이 걸렸습니다.
21년 동안 모든 것을 쏟아부은 회사에서 은퇴하고 동시에 신체적 한계도 느끼면서 에너지 레벨이 바닥으로 내려갔다고 느꼈습니다. 아무런 의욕이 없다, 무력감과 우울감이 깊어 뭘 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하나도 없다고 하소연하는 내 이야기를 상담 선생님은 한참을 귀기울여 듣더니, “그런데 에너지가 있으면 어디에 쓰시게요?”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심지어 서운하기까지 했습니다.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내담자를 따뜻하게 위로해주지 못할망정 이렇게 도발적으로 힐책하듯 질문하다니….’ 현직에 있을 때와 달리 나를 존중하지 않고, 심지어 무시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날 저는 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상담실을 나왔습니다. 그 질문이 내게 소중한 경책이었음을 알게 된 건 아주 나중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은퇴 뒤 맡았던 사외이사, 초빙교수직까지 다 내려놓고, 이제 남은 인생에서는 시간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지내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일없는 일상을 겪어보니 적막강산, 고립무원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시간이 너무 힘들어서 ‘사회 활동을 다시 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다 ‘언제까지 은퇴를 미룰 거니’라는 생생한 목소리가 내 안에서 들렸습니다. 내게 남은 에너지를 그렇게 써서는 안 되겠다는 무의식의 외침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상담 선생님은 그것을 내적 건강성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여전히 우울감이 심하고 의욕이 없던 어느 날, 미국에서 큰딸이 다니러 왔습니다. 내키지 않았지만, 딸의 제안으로 집 근처를 함께 걸었습니다. 참 오랜만이었습니다. 그리고 상쾌함을 느꼈습니다. 옆에서 발걸음을 맞추던 딸은 항우울제 복용을 권했습니다. 저처럼 힘들 때 약의 도움으로 크게 좋아지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보았다면서요.
상담 선생님에게 상의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약이 도움이 되는 경우가 분명히 있지만, 제 경우엔 약의 도움 없이 정기적으로 상담하면서 지내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몸은 기계가 아니잖아요? 고속도로 모드에서 순식간에 비포장 국도 모드로 전환되는 게 아니잖아요? 탑돌이 하듯이 몇년을 집중해서 현실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해요.”
오래전에 읽었던 피에르 테야르 드샤르댕 신부의 ‘신이 일하는 느린 방식을 신뢰하라’(Trust in the Slow Work of God)라는 시가 생각나서 찾아서 읽어보았습니다.
“우리는 지체 없이 즉각 목적을 달성하고 싶어서 늘 조급하다./ 중간 단계는 다 생략하고 싶어 한다./ 아무도 모르는 어떤 새로운 세계에 가고자 하면서도,/ 그리로 가는 길 위에서의 과정을 못 참아 한다. (중략) 그 여정이 불안하고 또 엄청나게 길게 느껴진다. (중략) 그러나 끝내 신이 당신을 손을 잡고 이끌어주리라고 신뢰하라./ 불안하고 초조한 당신, 불완전하다고 느끼는 당신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라.”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배우는 진화론과 교회에서 얘기하는 창조론으로 갈등할 때, ‘창조적 진화론’을 주창한 고고학자이면서 예수회 신부였던 테야르 신부를 만난 건 큰 축복이었습니다. 로마교황청에 의해 파문 직전까지 몰렸고 결국 모든 저술 강론 기회를 박탈당한, 그야말로 새로운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에서 불안과 초조를 견뎌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게 얘기하는 듯해서 시를 읽으며 공감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힘든 시간들이었습니다. 다 지나간 과거를 자연스레 흘려보내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편안해지는 데까지 2년 이상이 필요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제 경우에는 우울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우울과 함께 버티고 견뎌내자, 우울감이 ‘이제 됐다’ 하면서 서서히 저를 떠나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여기’가 익숙해지고 편안해진 것 같습니다.
상태가 많이 좋아진 뒤, 상담 선생님께 왜 그때 약 복용 없이 견디는 걸 권했는지 물었습니다. 답은 사람마다, 증상마다 그리고 생활 조건에 따라서 다 다르다는 것이었지요. 외부적 충격이 크고 트라우마를 겪는 경우, 특히 주변에서 지지를 받을 수 없을 땐 항우울제가 호르몬 변화를 유도해서 생리적으로 우울감에서 나오게 해줄 수는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 경우엔 약을 복용하게 되면, 오히려 달라진 현실 속에서 나 자신이 깊어지고 성숙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달라진 현실과 자기 자신을 직면하고 나서 오는 희열과 안정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삶을 배우는 사람
2016년 엘지(LG) 인화원장으로 퇴임하기 전까지 ‘치열하고 치밀하게 집요하게 사는 것’을 모토로 삼았다. 은퇴 뒤 삶의 방향은 ‘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다. 은퇴와 노화를 함께 겪으며,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