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4년 11월 ‘민청학련’ 사건 구속자 가족 30여명이 ‘더 이상 못참겠다. 구속자 석방하라’ 등의 펼침막을 앞세우고 서울 명동성당부터 종로3가까지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보도사진연감
[긴조 재구성]-하- 교수라고 알았는데 형사!
1974년 4월 중순 한양대 법정대 2학년이던 이상익(54·한국도로공사 감사)씨는 서울 광화문 근처의 ‘초월다방’을 찾아갔다. 공대 심기화씨와 법정대 이우회씨 등 동료 학생 10여명과 만나 곧 다가올 중간고사를 거부하고 시험장에서 ‘박정희 독재정권 타도’를 주장하는 유인물을 나눠주려는 계획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학교 안에서는 감시가 너무 심해 시내 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것이다.
교수인 줄 알았던 사람이 형사라니=이씨가 다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학교에서 자주 마주치던 40대 중반의 교수였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학교도 아닌 시내 다방에서 교수를 만난 이씨는 반갑게 인사했다. 그런데 교수의 옷차림이 이상했다. 학교에서 보던 말쑥한 양복차림이 아니라, 점퍼와 흰색 운동화 차림이었다. “이상익, 꼼짝마라! 김 형사, 붙어!” ‘교수’의 명령과 동시에 20여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이씨와 그의 동료들을 둘러쌌다.
‘학교에 프락치가 있다더니 이렇게 당할 줄이야….’ 이씨는 학교에서 자주 마주친 그 남자를 교수나 교직원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옆의 한 건물 뒤로 끌려가자 검정색 승용차 3대와 트럭이 시동을 걸어놓고 대기 중이었다. 트럭에 올라타자 형사들은 “입 여는 놈은 죽여버린다”고 소리쳤다. 이씨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처박아야 했다.
트럭에서 내리니 성동경찰서였다. 3층 조사실로 끌려간 이씨를 형사 대여섯명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우선 기를 죽이려는 것이 목적인 것 같았다. 흠씬 때리고 난 뒤 옷을 모두 벗겼다. 주머니와 옷솔기 따위를 샅샅이 뒤지더니 구두 밑창까지 뜯어냈다. 도대체 뭘 찾겠다는 건 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형사들은 번갈아가며 조사실로 들어와 배후를 캐물었다. 아무도 없다고 대답하면 또 다른 형사가 들어와 똑같은 질문을 계속했다.
어느날 들이민 낯선 ‘조직도’=며칠이 지나자 계급이 좀 높아보이는 형사가 들어왔다. 얼굴을 바싹 들이댄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 상익이, 너는 나가야 할 것 아니야? 어머니도 연로하신데…. 이건 비밀로 해줄 테니까 배후를 말해.” 끝까지 외부 조종자가 없다고 말하자 부드럽던 표정이 돌변했다. “너 김일성이 새끼지? 김일성이 시킨 것 아니냐?” 그는 고함을 지르며 구둣발로 이씨를 마구 짓밟았다. 열흘이 지나도록 누구의 이름도 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형사들이 그림을 가지고 들어왔다. 간첩단 사건 보도 같은 데 등장하는 ‘조직도’였다. 거기엔 지난 겨울에 만났던 학교 안팎의 친구들 얼굴과 이름이 선으로 얽혀 있었다. ‘나를 간첩으로 만들려고 하는구나!’ 이씨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제서야 구두 밑창에서 그들이 찾으려던 것이 암호문이나 지령서 따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산정권 수립을 목표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불법단체를 결성했다는 혐의로 무려 180명이 구속기소된 ‘민청학련’ 사건은 그렇게 만들어져갔다.
형사도 교도관도 은밀히 격려=성동경찰서에서 조사를 마치고 서울구치소로 옮겨질 때였다. 곁을 지키던 형사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30대 초반의 한 형사가 다가와 속삭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세상이 이런데 어떡하겠냐. 조금만 고생하면 나올테니 건강하게 있다 오거라.” 형사의 표정에 미안한 마음이 묻어났다. 수없이 얻어맞아 안 아픈 데가 없었지만 형사의 한마디는 큰 위안이 됐다.
구치소에서도 용감한 대학생들에게 건투를 기원하는 손길은 조용히 이어졌다. 몇몇 교도관들은 몰래 환자용 죽을 가져다주기도 했고, 학생들이 주도한 단식투쟁의 연락책을 맡아주기도 했다. 군법회의가 열린 육군본부에서 근무하던 한 헌병은 이씨가 이곳에 잡혀있다는 것을 집에 알려주기도 했다.
도망치듯 재판정을 빠져나간 ‘별들’=5월 초 군검찰에 송치됐다. 소령 계급장을 단 검찰관은 쏟아져 들어오는 정치범을 상대하느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소령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어린 학생 놈이 공부는 안 하고 뭘 안다고 까불어?” 이씨는 “학생이기 이전에 국민”이라고 항변했다가 따귀를 맞았다. 8월 중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7년이 선고됐다. 붙잡힌 지 넉 달 만에 수사와 재판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9월에 항소심 공판이 열렸다. 육군 대장이 재판장이었다. 이씨는 최후진술에서 당당히 외쳤다. “우리는 반정부 사범일 수는 있지만 반국가 사범은 아니다. 그 차이를 재판관인 당신은 모르겠는가!” 가족들과 학교 동료들 30여명이 들어선 재판정이 술렁였다. 함께 재판을 받던 피고인들 6명이 동시에 일어나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총을 메고 재판정을 지키던 헌병이 뛰어와 피고인들을 넘어뜨리고 입을 막으려 했다. 어깨에 번쩍이는 별을 단 재판관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선고도 하지 않은 채 도망치듯 재판정을 빠져나갔다. 며칠 뒤 구치소로 송달된 선고문에는 ‘징역 7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유신재 기자, 노현웅 수습기자 ohora@hani.co.kr
도망치듯 재판정을 빠져나간 ‘별들’=5월 초 군검찰에 송치됐다. 소령 계급장을 단 검찰관은 쏟아져 들어오는 정치범을 상대하느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소령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어린 학생 놈이 공부는 안 하고 뭘 안다고 까불어?” 이씨는 “학생이기 이전에 국민”이라고 항변했다가 따귀를 맞았다. 8월 중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7년이 선고됐다. 붙잡힌 지 넉 달 만에 수사와 재판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9월에 항소심 공판이 열렸다. 육군 대장이 재판장이었다. 이씨는 최후진술에서 당당히 외쳤다. “우리는 반정부 사범일 수는 있지만 반국가 사범은 아니다. 그 차이를 재판관인 당신은 모르겠는가!” 가족들과 학교 동료들 30여명이 들어선 재판정이 술렁였다. 함께 재판을 받던 피고인들 6명이 동시에 일어나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총을 메고 재판정을 지키던 헌병이 뛰어와 피고인들을 넘어뜨리고 입을 막으려 했다. 어깨에 번쩍이는 별을 단 재판관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선고도 하지 않은 채 도망치듯 재판정을 빠져나갔다. 며칠 뒤 구치소로 송달된 선고문에는 ‘징역 7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유신재 기자, 노현웅 수습기자 oh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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