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장근씨가 지난 5일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병동에서 환자의 보호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난 5일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별관에 있는 호스피스병동. 유난히 조용하다는 점만 빼면 일반병동과 다를 바 없었다. 오전 10시 회의를 마친 자원봉사자 10여명이 각 병실에 나타나면서 활기를 띠었다. 유장근(61)씨는 다른 자원봉사자 2명과 함께 목욕을 맡았다. 오전에 목욕할 77살 폐암 말기 환자는 의식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였다. 자원봉사자들은 환자가 깨지 않도록 침대를 조심스럽게 욕실로 끌고 갔다. 침대를 이동식 욕조 옆에 나란히 고정하고 높이까지 맞췄다. 침대에 올라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환자를 모포에 싸서 욕조로 옮기느라 다들 안간힘을 썼다. 옷을 벗긴 뒤 몸 구석구석 씻기고 면도까지 말끔하게 마쳤다. 몸을 닦고 옷을 거의 입혔는데 환자가 대변을 보고 말았다. 목욕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환자의 아내는 “미안해서 어떡해요”를 연발했다. 거의 1시간에 걸친 목욕이 끝나자 자원봉사자들은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자원봉사자가 하는 일 중에서 목욕이 육체적으로는 제일 힘든 일이지만, 환자와 심리적인 교감에는 제일 좋습니다. 환자들 대부분 처음에는 목욕을 꺼리는데 한번 목욕을 받고 나면 왜 빨리 안 해주느냐고 재촉하시거든요. 목욕이나 발마사지처럼 자신의 신체를 누군가에게 맡길 때 마음도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유씨는 2011년 8월부터 서울성모병원에서 매주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일반병동에서 외국인 환자의 통역 봉사를 맡았다. 그때 자원봉사자가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호스피스 교육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그해 11월 호스피스병동 봉사를 자원했다. 2년 전부터는 자원봉사자 조장까지 맡았다.
2. 목욕을 끝낸 환자에게 유씨가 옷을 입히고 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보면서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죽음을 앞둔 아가씨가 어쩌면 저렇게 명랑하고 남을 배려할 수 있을까 감동한 적도 있고, 연세가 높으신 분이 죽음이 두려워 벌벌 떠는 모습을 본 적도 있습니다. 부처님 같은 미소를 띠고 묵묵히 죽음을 마무리하시던 어르신도 눈에 선합니다. 저도 자연스럽게 죽음을 대할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되고, 그런 과정으로 가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되더군요.”
엘지그룹 영업 총괄 부사장을 지낸 유씨는 2009년 말에 퇴직했다. 30년의 직장생활을 끝내고 몇달간은 자유로움을 만끽했지만, 곧 무료함과 허탈감이 밀려왔다. 게으르고 무력하게 술로 때우는 일상이 인생 최악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때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로 걷기여행을 제안했다. 2011년 봄, 800㎞ 33일의 대장정에서 유씨는 직장에서도 얻지 못했던 뿌듯함과 자신감을 얻었다. 길 위에서 사색을 통해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고행에 가까운 여정에서 아내와 사랑의 깊이까지 더했다. 부부 단둘이 떠난 첫번째 여행이었다. 귀국한 뒤 그 감동과 기록을 담아 <산티아고 길의 소울메이트> 책을 출판했고, 가치 있는 삶의 길을 찾아 나섰다.
10여년 전부터 서울성모병원에서 봉사를 해온 아내의 권유로 같은 병원에서 봉사에 나선 것이다. 지난해 4월부터는 서울대 미술관에서 도슨트(해설사)를 시작했다. 그전에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받았던 도슨트 양성 교육이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미술을 가까이할 기회가 없어 아예 생소한 분야였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익힌 발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난해하기 그지없다는 현대미술을 하나하나 공부하고 이해하면서 세 차례의 기획전에서 도슨트로 활동했다. 이제는 서울시립미술관의 도슨트라는 새로운 목표까지 세웠다.
올해 2월부터는 중림사회복지관에서 중국어 기초반 강의까지 맡았다. 중국어 역시 은퇴하고 난 뒤에 공부하기 시작했다. 학원 수강 3년 만에 강사로 변신한 것이다. 중국어 평가시험 5급 시험도 통과했고, 최고급 단계인 6급에 도전하기 위해 준비중이다.
“은퇴생활의 장점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벌일 수 있다는 겁니다. 벌이다 보면 모르던 나를 찾는 경우가 꽤 있어요. 제가 글 쓰는 재주가 있었는지 전혀 몰랐어요. 미술을 처음 공부해서 발표를 했는데 칭찬을 받았습니다. 은퇴하고 중국어를 열심히 배웠더니 남을 가르칠 기회가 생겼어요. 제가 가진 잠재력을 저도 몰랐던 겁니다. 모두 닥치는 대로 열심히 하다가 우연히 찾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유씨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경영’이라고 못박았다. 당장 그런 기회가 없기 때문에 봉사를 선택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직장이 구해진다면 봉사를 그만두고 직장에 가겠다고 했다. 단, 돈을 벌기 위해 직장을 다녔던 예전과는 다르다. 회사의 발전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경영을 하고 싶다.
“저는 계획을 갖고 봉사를 시작한 게 아니라 우연한 기회가 이어지며 닥치는 대로 해왔을 뿐입니다. 은퇴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하라고 말들 하시는데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알기 힘들어요. 그런데 저는 닥치는 대로 열심히 하다 보면 그게 좋아지더군요. 그래서 후배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좋아하는 일만 찾으려고 하지 말고 뭐라도 해보라고. 열심히 하다 보면 분명히 좋은 점이 보일 거라고 하죠. 은퇴자들이 과거 경력에 얽매이지 말고 여러 가지를 시도해서 그중에서 좋아지고, 전문화되고, 가치가 생기는 일을 선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글·사진 원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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