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학회와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함께 마련한 학술 심포지엄 ‘전환기, 한국 사회와 사회정책 비전’이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3층 청암홀에서 열렸다. 토론을 하고 있는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왼쪽부터),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부원장, 신광영 한국사회학회장,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남찬섭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이승윤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불평등이 나날이 심화하고,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갈수록 심해져 한국 사회의 미래가 밝지 않다는 전망이 나온 것은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노동·산업·경제 구조의 변화는 이런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위기감이 높아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이 ‘암울한 미래’의 전제가 ‘이대로 가다간’이라는 점이다. 역대 정부가 지금까지 펼쳐온 경제성장 중심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국민 삶의 질을 높이려는 통합적인 비전을 마련하고 실천한다면 다른 결과를 만들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런 문제의식이 확산하면서 학계는 물론 청와대와 정부부처 등에서도 복지국가로 나아갈 종합적인 중장기 국가 비전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고 있다.
■
“지금이 근본적 변화의 최적기” 학계 요구 분출 지난달 28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린 ‘전환기, 한국 사회와 사회정책 비전’ 학술 심포지엄은 삶의 질을 담보할 사회정책의 밑그림을 다시, 제대로 그려야 한다는 학계의 고민이 녹아든 대표적인 자리였다.
특히 ‘복지한국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주제로 발제를 맡은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복지를 정책과 제도로만 바라봐선 안 된다. 경제적·정치적 유산을 함께 고려해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교수는 △공적 복지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결과 국민들이 부동산 등 사적 자산 축적에 몰두하게 됐고 △‘빚내서 집 사는’ 경향 탓에 임금 등 가구소득을 늘려도 빚 갚는 데 쓰느라 수요·소비·투자가 늘어나지 않았으며 △기술혁신이 노동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고용에 문제가 생기고 사회보장 대상이 축소됐다고 짚었다. 따라서 정부가 전면에 내세운 소득주도성장은 부동산 가격 안정과 사회보장제도의 전면적 확충이 전제돼야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며, 임금보다 사회적 임금, 즉 복지 지출을 확대해 가구의 실질 가처분소득을 올리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를 실현하려면 증세가 필수라고 덧붙였다. 윤 교수는 “지금까지의 경로를 이탈해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게 문재인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며 대중적인 정부 지지와 복지 요구가 높은 지금이 대전환을 이룰 최적기라고 강조했다.
한국을 사회보장 수준이 낮은 ‘작은 복지국가’로 보는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도 또 다른 발제에서 “작은 복지국가를 만들어낸 정치경제적 조건과 저성장, 저출산 고령화 등의 비우호적인 구조적 변동을 감안해 사회정책 발전 전략을 짜야 한다”며 성장과 복지가 선순환하려면 개별 정책 단위를 넘어선 종합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경제에서 사회로…정책 무게중심 이동하나 정부 차원에서 중장기 비전을 마련하려는 시도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건 조만간 출범할 예정인 사회정책전략회의다. 대통령이 의장을 맡는 사회정책전략회의는, 그동안 정부의 정책 패러다임이 경제 논리에 지나치게 편향돼 있어 불평등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고착화했다는 반성에서 나왔다. 예산 편성에 앞서 재정 운용의 방향과 전략을 결정하는 재정전략회의는 매년 대통령이 주재하지만, 정작 국민 생활과 직결된 사회정책은 현안 대응 수준에 그쳤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구성되는 사회정책전략회의는 사회정책의 중장기 비전과 로드맵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이행하는 기구다. 이달 말 출범할 예정이나, 날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다뤄야 할 주제가 워낙 광범위해 경우에 따라선 출범 시기가 조금 늦어질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사회정책전략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 차원의 사회정책 비전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책기획위원회의 국정과제추진단에서 청사진을 마련하고 있는데, 정부의 복지 철학인 ‘포용적 복지국가’(어느 계층도 소외됨이 없이 경제성장의 과실과 복지를 고루 누리면서 개인이 역량과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나라)의 개념과 실현방안이 구체적으로 담길 것으로 보인다.
이와는 별도로 정책기획위원회 차원에서 40~50년 뒤의 한국을 그려보는 국가 미래비전 수립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11월께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성경륭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 김재훈 대구대 경제학과 교수, 이호근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 학자들에게 연구용역을 맡겨 지난달 하순 ‘국가 중장기 발전 전략 사례분석을 통한 향후 미래비전 수립 방향’이라는 최종 보고서를 제출받았다. 국제 사례 비교를 바탕으로 한 이 보고서엔 혁신적 포용국가 건설을 위한 불평등 해소, 혁신성장 등의 제도적 설계 방안이 담겼으며, 한국 사회의 변화상을 놓고 미래학적인 접근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9~2023년 시행할 2차 사회보장기본계획 수립을 앞둔 사회보장위원회에선 이 계획의 밑바탕이 될 ‘사회보장 2040’ 비전을 만들고 있다. 역시 포용적 복지국가라는 큰 틀 아래 노동, 교육, 건강, 소득보장, 사회서비스, 재정의 7개 세부 분야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두고 학계와 국책연구기관 전문가들이 난상토론을 거듭해왔다. 사회보장위원회 관계자는 “‘사회보장 2040’은 모든 국민이 적용받느냐(포괄성), 적정한 수준으로 보호받느냐(보장성), 계속 보장받느냐(지속가능성) 이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춘 사회보장제도의 틀을 제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보장 2040’ 초안은 이달 말이나 새달 초께 나올 예정이다.
■
‘부처 간 장벽’ 넘으려는 시도들 개별 부처에서도 종합적이고 거시적인 사회정책 비전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사회정책의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올해 말 완성을 목표로 사회보장과 경제, 환경의 지속가능성을 중심에 둔 ‘중장기 사회정책 방향’을 다듬기 시작했다. 지난달 보건사회연구원 등에 연구용역을 맡겨 격주에 한차례씩 비공개 포럼을 열고 있다. 사회변화에 근본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만큼, 포럼 주제는 복지정책뿐만 아니라 노동시장 변화, 경제구조와 산업구조의 변화, 재정, 세금 문제까지 아우른다고 한다. 복지부 관계자는 “예산 등 당장의 실현가능성보다는,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가는 게 바람직한가를 염두에 둔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범정부 기구인 정책기획위원회와 사회보장위원회에서 이미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는데, 굳이 개별 부처까지 나서서 중복된 일을 왜 하느냐는 지적도 있다. 이에 또 다른 복지부 관계자는 “주무부처 차원의 의견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작업의 결과물은 올해뿐만 아니라 내년 사회정책전략회의에도 지속적으로 보고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2012년 출범한 기획재정부의 중장기 전략위원회도 경제·사회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중장기 전략을 올해 안에 내놓을 방침이다. 예산이 투입되는 모든 재정사업이 기획재정부와 관련되는 만큼, 중장기 전략위원회가 그간 세차례 내놓은 전략에 경제정책만 담겼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번엔 민간위원 20명 가운데 경제 관련 인사가 절반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경제정책의 비중이 줄고 노동, 교육, 환경, 복지, 남북관계 등 삶의 질과 관련한 사회정책의 비중이 커졌다. 민간위원들이 3일까지 네차례 진행한 끝장토론식 간담회와, 한국개발연구원(KDI)·한국노동연구원·한국보건사회연구원·대외경제정책연구원·산업연구원 등의 국책연구기관이 나눠 맡은 연구용역 결과물 등을 종합한 보고서 초안은 9월말~10월초께 나올 예정이다. 이는 공개토론회 등 공론화 과정을 거친 뒤 올해 안에 정식으로 발표된다.
조혜정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 수석연구원
zest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