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
47은 주인공인 열네살 소년을 부르는 숫자다. 1830년대 미국 남부 목화농장에 사는 소년에겐 이름이 없다. 이름은 한 인간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데 필요한 것이다. 소나 말, 돼지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는 흑인 노예들은 47, 51, 36같은 숫자를 문신처럼 몸에 새긴 채 평생을 살아간다. 소설의 전반부는 소년 47이 겪는 냉혹하고 잔인한 농장 생활에 초점을 맞춘다. 사슬에 묶이고 가죽 채찍을 맞으며 죽을 때까지 기계처럼 일하는 농장의 노예들은 서로를 보듬어 안을 여유가 없다. 47은 주인의 채찍만큼이나 가혹한 어른 노예들의 학대와 멸시를 견디며 힘든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21세기에 미스터리 시리즈 작가가 쓰는 흑인 노예 이야기가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과 같을 리 없다. 어느날 주인공 앞에 존 톨이라는 수수께끼같은 인물이 나타나면서, 소설은 돌연 신화와 판타지, 공상과학의 세계로 독자들을 이끈다.
존 톨은 47에게 “인간은 다른 인간의 주인이 될 수 없으며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인간이 진정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말해준다. 근대 과학의 빛이 암울한 중세를 밝혔듯, 어둡고 막막했던 소년의 마음은 존 톨이 전하는 ‘미래의 언어’로 불같이 꿈틀거린다. 세상의 질서에 맞서 싸우는 삶은 더욱 거칠고 험란하지만, 47은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 월터 모슬리 지음, 아침이슬/9천원. 이미경 기자 friend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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