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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정치구호 전혀 없었다…제자들 상처 안받길”

등록 2006-12-07 21:07수정 2006-12-07 22:00

김형근 교사
김형근 교사
지난해 ‘통일열사 추모제’ 참석한 군산 전교조 김형근 교사
보수신문 문제제기 이해 안가

“고입 연합고사(12월13일)가 일주일도 남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시험 치르는데 악양향 받지 않고, 마음에 상처도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7일 전북 군산ㄷ고 도덕과목 김형근(47·사진) 교사는 제자들 걱정에 한마디 한마디 조심스레 입을 뗐다. 최근 일부 신문이 김 교사가 지난해 5월 전북 임실ㄱ중 근무때 ‘남녘 통일애국열사 추모제’에 학생 180여명과 참여한 사실을 두고 때아닌 비판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이틀간 열린 행사 중 문화제 성격의 전야제에만 참석했고, 이튿날 본행사 대신 등산을 했다”며 “따라서 제국주의 양키군대를 섬멸하자 등 정치적 구호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전야제에서는 학생들이 6·15공동선언 암기, 북녘 친구에게 편지쓰기, 통일기차 이어달리기 등을 진행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2003년 3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학생들이 스스로 전쟁을 반대하는 내용의 배지를 만들어 착용했고, 인터넷 카페도 개설해 북녘 친구들에게 편지보내기 등을 벌였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행사 참여 이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공안당국 조사를 받은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저는 학생들에게 ‘어심수심’(魚心水心)이라는 말을 자주 전합니다. ‘물고기가 움직이니 물도 따라 움직인다’는 뜻으로, 자신이 능동적으로 살아갈 때 주변환경이 바뀝니다. 지금의 분단상태를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자율적인 삶을 통해 통일의 주역으로 커 나가기를 바랍니다.”

1978년 전북대 교육학과에 입학한 그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도피하다가 80년 7월 경찰에 붙잡혀 9월 강제징집됐다. 87년부터 전북 익산에서 ‘황토’라는 인문사회과학 서점을 운영했고 범민련 전북지부,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 등에서 통일운동을 해왔다.

지금까지 집시법과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5차례 투옥돼 3년 가량 옥살이를 했지만 5·18 및 민주화보상 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민주화과정의 고통스런 세월을 돈과 바꿀 수 없다는 믿음과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99년 교사로 뒤늦게 임용돼 올해 2월까지 임실ㄱ중에 있다 군산ㄷ고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전교조 전북지부 통일위원장, 전북통일교사모임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전주/박임근 기자 pik007@hani.co.kr

12월6~7일 한 보수신문은 2005년 5월 전북 순창 회문산에 있었던 일을 크게 보도했다. 전교조 소속 김형근(47)교사가 학생 180여명을 이른바 ‘빨치산 추모제’에 인솔해 갔다는 것이다. 1년반이나 넘은 이 시점에서 왜 이런 기사가 계속 보도되는 것일까.

<한겨레>는 해당 교사를 인터뷰해 당시 상황 등을 들어봤다. 인터뷰는 12월7일 오전 김 교사가 재직하고 있는 전북 군산ㄷ고 교장실에서 이뤄졌다. 김 교사는 고입 연합고사(12월13일)를 앞둔 학생들을 시종일관 걱정했다. 전임지에서 그가 그동안 가르쳤던 학생들이 시험을 앞두고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을 지 우려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 전문이다.

-언제 누가 주최한 행사였나?

=2005년 5월28일(토)과 29일(일) 이틀간 있었다. 전북 재야 및 시민단체 주최였다.

-학생 등의 참석규모는?

=참가한 사람은 모두 180여명이다. 졸업생 40여명, 중학생 110여명이다. 나머지는 학부모, 일부 교사 등이다. 180여명과 전향한 장기수, 농민, 관계자 등 모두 전야제에 300여명이 있었다. 우리가 참여하지 않았으면 인원이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주최 쪽도 이를 고마워했다. 우리 학생들은 다른 문화제 행사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학생들은 28일 문화제 성격의 전야제만 참석했다. 본행사는 29일이었다. 학생들이 숙소(청소년 야영장)에서 잤고, 29일 아침 일찍 학생들과 산에 올라갔다. 즉 본행사는 참석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국주의 양키 군대를 섬멸하자” 등) 정치적 구호는 없었다. 여성농민중창단 청보리단 등 농민들도 참여했다. 학생들은 6·15공동선언 암기, 북녘친구에게 편지쓰기 등을 했다. 전임지인 임실ㄱ중에서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2003년 때부터, 학생들이 전쟁에 반대하며 배지를 만들어 착용했다. 자연스럽게 학생들이 주도해 인터넷 카페도 만들어 북녘학생 불특정다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시작을 했고, 학생들의 ‘통일열차 달리기’를 마지막으로 끝난 것 같다. 한상렬 목사께서 “경찰이나 장기수나 모두 화해하는 자리가 돼야한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학부모들도 있었다고 했는데.

=2004년께부터 통일산악회를 만들어 학부모들과 한달에 1번꼴로 등산을 했다. 1차때는 지리산을 갔고, 2차때는 기억이 나지 않으며, 3차때 순창 회문산을 간 것이다. 지금까지 15차례 등산을 함께 했다. 학생들이 통일얘기를 하니까 학부모들이 확인차 간 것이다. 학부모들은 교육에 열정이 있는 서민들이다.

-문제가 있었다면 당시 공안당국에서 조사를 했을텐테.

=아직까지 그런 적 없다. 보도처럼 우려할 만한 그런 일이 아니다.

-보수언론이 왜 이 시점에서 문제를 삼는 것으로 보나?

=(조심스럽게) 진보적 단체인 전교조를 매도하는 것이고 전교조 죽이기라고 본다. 대체로 선생님들은 약하다. 내용도 없는데 쉬운 상대를 대상으로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 악랄한 기사이다. 기사에 나온 학부모 말도 왜곡됐다.

-취재에 응했나?

=학생들의 시험(13일)이 있기 때문에, 기사를 쓰더라도 학생에게 영향이 없도록 시험이후에 하자고 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해당 신문사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할 것이다.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다 동원해 대응할 것이다.

-보도가 나가고 전화를 많이 받았을텐데.

=하루만에 600여통 전화를 받았다. 우익단체들의 비난이 많았고, 격려전화도 일부 있었다.

-본인 때문에 학생들에게 신경을 많이 쓸텐테.

=항상 조심스럽다. 학생들이 자발적이다. 2003년 중학교에서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한 반전 배지운동 벌어졌다. 당시 학생들이 ‘전쟁반대, 미국반대’ 내용으로 배지를 만들자고 했다. 그러나 (반미주의라 몰릴까봐) 감당할 수 없어 반대했다. 그랬더니 한 학생이 ‘노 터치 월드’(미국은 세계를 건들지 말라)는 말로 대신 바꿔왔다. 북녘학생에게 편지쓰기도 학생들이 먼저 제안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이 될 수 있어 걱정했지만, 학생들의 뜻을 존중했다.

배지달기운동을 전개할 때, 당시 우익단체 등의 학교에 대한 공격이 심했다. 학교폭파 등의 폭언이 이어졌다. 당시 교장 선생님은 청심환을 먹고 출근할 정도였다. 그런 상태에서 재야 통일운동을 하며 알게 된 장기수 분들이 학교에 찾아와 아이들과 자연적으로 친해졌다. 정치문제, 이념이야기는 없었고, ‘행복이 무엇인가’ 등의 내용이었다. 학교와 학생들이 힘들때 장기수 할아버지는 또닥거려줬다. 우리는 지금 과거 이데올로기로 피해받은 사람들을 서로 끌어안고 가야한다. 북한도 포용하는데 통일을 해야한다면 장기수들을 끌어 안아야한다. 한국현대사는 남북분단 과정에서 갈등과 반목이 있었다.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이를 바로 가르쳐 줬다. 장기수들은 그 시절을 증언한다. 우리 체제로 전향한 장기수의 문제를 치유해야 한다.

-교육관은 어떤가?

=학생들에게 ‘어심수심’(魚心水心)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물고기가 움직이니 물도 따라 움직인다’는 뜻이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살아갈 때 주변환경이 바뀐다. 지금의 분단상태를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학생들이 자율적인 삶을 통해 통일의 주역으로 커 나가기를 바란다.

-주변과의 관계는?

=하늘 아래 부끄러움이 없다.

김형근 교사는?

전북 김제 출신으로 전주신흥고를 졸업했다. 1978년에 전북대 교육학과에 입학한 그는 학생운동과 인연을 맺었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도피하다가 80년 7월 경찰에 붙잡혀 그해 9월 강제징집됐다.

우여곡절 끝에 87년부터 전북 익산에서 ‘황토’라는 인문사회과학 서점을 운영했고 범민련 전북지부,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 등에서 통일운동을 해왔다. 지금까지 집시법과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5차례 투옥돼 3년 가량 옥살이를 했다. 88년 대학을 졸업하고 99년 교사로 임용돼 올해 2월까지 임실ㄱ중에 있다가 군산ㄷ고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전교조 전북지부 통일위원장, 전북통일교사모임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그는 5·18 및 민주화 보상과 관련해 전혀 신청을 하지 않았다. 무엇을 받고자 한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화과정의 고통스런 세월을 돈과도 바꿀 수 없다는 믿음과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이 그 이유다. 이 때문에 주변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경우가 있어 곤혹스럽다고 말한다. 박임근 기자 pik00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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