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오후 3시 녹색대학에서 열린 화요특강 ‘녹색이념으로 본 자연건강의 원리와 실제’ 강연에서 학생들이 토종 약초 전문가 최진규(오른쪽) 전 한양대 겸임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다.
첫 학부생 졸업 앞둔 함양 ‘녹색대학’을 가다
88올림픽 고속도로 경남 함양나들목을 빠져나와 고부라진 아스팔트길을 따라 승용차로 20여분 가다보니 마을 들머리에 ‘피어라 녹색대학’이란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교문과 외부인의 출입을 감시하는 경비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탁트인 운동장에 지은지 수십년 됐을 법한 낡은 2층짜리 건물이 손님을 맞았다. 겉모습만 보면 도무지 대학이라고 생각들지 않았다. 20여평 남짓한 1층의 한 교실에서 화요특강이 시작되자 10여명의 수강생들이 여기저기서 찾아왔다. 특강의 주제는 ‘녹색이념으로 본 자연건강의 원리와 실제’. 먼저 생태주의 철학자인 한면희 녹색대학 총장이 20여분 동안 동·서양 의학의 차이와 한계를 설명했다. 이어 지리산에서 토종 약초를 연구하고 있는 최진규(46) 전 한양대 겸임교수가 고추장 등 우리의 전통음식으로 불치병에 걸린 이들을 직접 치료한 경험을 과학적 원리와 함께 들려줬다. 강의가 2시간이나 계속됐지만 수강생들은 깨알같은 글씨로 수업내용을 적기에 바빴다. 이렇게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녹색 삶을 추구하는 장회익 전 서울대 교수 등 각계 인사 33명과 후원인 2000여명이 3억여원으로 경남 함양군 백전면 평정리의 한 폐교(4500여평)를 사들여 2003년 3월 개교한 녹색대학의 실험은 4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운영자금을 댈 재단도 없고 교육부의 인가를 받지 못해 국비나 기업체 후원도 받지 못했지만 “취업공장으로 변한 기존 대학의 틀을 깨고 서로에게 헌신하는 공동체 요람을 만들자”는 개교 정신을 꿋꿋히 지켜가고 있었다. 4년 동안 흘린 땀의 결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해와 올해 여름 2년 과정의 대학원 졸업생을 낸데 이어 내년 2월이면 4년 과정의 학부생 3명이 처음 졸업한다. 이들은 4년 동안 120학점 이상을 따야 하고 1~2학년은 기숙사에서 생활해야 하는 등 녹색대학의 엄격한 학제와 공동체 훈련을 이겨내고 개교와 함께 입학한 귀농준비자·고교졸업생·환경활동가 등 37명 가운데 먼저 졸업하는 영광을 누린다. 대학졸업 뒤 사회운동 등을 하다가 2003년 녹색대학에 입학한 졸업예정자 이희정(34·여)씨는 “녹색대학은 삶의 방향을 잃은 나를 일으켜 준 스승과 같은 존재”라며 “대학원에서 녹색대학의 이념을 더 배운 뒤 녹색대학 지킴이가 되겠다”고 말했다. 녹색대학 학생들과 교수들은 지난달 20일 숙원사업의 하나였던 한옥 기숙사를 1년만에 완공했다. 그동안 1~2학년은 운동장 구석에 설치한 컨테이너에서 생활했다. 새로 지은 기숙사를 짓는데는 인건비가 거의 들지 않았다. 이론수업과 함께 직접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짓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수업방식이 몸에 밴 학생들이 직접 집을 지은 까닭이다. 기숙사 건축재료도 생태건축을 지향하는 녹색대학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벽돌이나 철골 대신 사람의 기를 북돋아주는 진흙과 나무를 이용했다. 녹색대학도 여느 단체나 조직처럼 혹독한 성장통을 겪었다. 학생대표가 신입생 모집 때 면접위원으로 나서고 학생들이 만드는 수업을 학점에 반영하는 등 독특하고 민주적인 운영방식에 매력을 느낀 입학지원자와 후원자들이 밀려들어 몸집이 커지면서 예산 전용 등 여러 문제점들이 불거졌다. 일반 사립대학에선 흔한 일이었지만 엄격한 도덕적 잣대가 요구되는 대안대학에선 용납될 수 없었다.
교수의 학생 구타사건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후원자가 500여명으로 떨어지고 등록학생수도 평균 40~50여명으로 줄어들어 전국 각지에서 비행기와 열차를 타고 시골 오지로 오가는 전임 교수 10여명의 급여(1인당 60만원)를 주기에도 벅찼다. 2명의 총장이 중간에 사퇴하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하지만 이런 악조건도 세상을 바꿔보려는 ‘이단아’들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뜻있는 이들이 다시 머리를 맞댔다. 성장통을 겪는 과정에서 일었던 갈등을 봉합하고 서로에게 입힌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또 공동체 대학에 걸맞게 모든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총회(야단법석)와 운영위원회에서 대학 운영방식을 결정하도록 하는 등 민주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만들고 급여 등 민감한 모든 재정 사항을 샅샅이 공개했다. 재정자립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수업과 함께 실천공간으로 쓰야 할 밭이 없어 운동장 한 켠을 밭으로 사용하고 있는 수업 환경과 교수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선 기업체 등 외부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 새해 13일 사단법인 설립 총회를 거쳐 사단법인 인가를 받을 예정이다. 사단법인으로 전환되면 녹색대학을 도우려는 외부의 지원을 맘껏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검정고시로 중·고교를 마친 뒤 의대에 진학했다 1학기만 다닌 뒤 그만두고 올 3월 녹색대학에 입학한 임아무개(17)군은 “아직 녹색대학의 정신과 이념을 잘 모르지만 녹색대학이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면희 총장은 “환경재앙이 닥치는 지구의 생명력을 되살리고 황금물질 만능주의가 인간의 공동체성을 갉아먹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녹색대학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교정을 빠져 나올 때 다시 본 ‘피어라 녹색대학’ 팻말이 웃고 있었다. 함양/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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