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생, 공길, 연산은 모두 광대다. 그들이 드러내는 ‘광대의 세계’를 포착하면, 이 작품에 스며 있는 광대의 철학적 의미를 천착해 볼 수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용석 교수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 이준익의 ‘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는 그 제목에 함정이 있다. 그것이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와 같은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뒤마의 작품에서 주인공은 삼총사에 속하지 않은 제4의 인물, 즉 달따냥이다. 현대 문학이론에 따르면 작가는 해석의 주체인 독자를 존중한다는 뜻에서 작품에 대한 해석의 지침을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제목은 있어야 한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려면 제목은 주제를 감추고 있거나 매우 모호한 것이 좋다. 이런 점에서, 뒤마의 소설은 제목에 관한 한 으뜸 감이며, 어쩌면 작가가 ‘실수’로 그렇게 뛰어난 제목을 붙였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받을 만하다.
<왕의 남자>의 경우도 제목이 주인공을 감추고 있다. 주인공은 왕(연산)도 그의 남자(공길)도 아닌 제3의 인물, 즉 광대 장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품의 운명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이 영화가 천만명이 넘는 관객과 호흡하면서 더욱 드러난 인물은 바로 연산과 공길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장생, 그리고 앞의 세 인물과 결정적으로 대비되는 제4의 인물 녹수는 작품을 향한 대중의 광적인 호응 속에 오히려 파묻혀 버린 느낌이다. 대중은 ‘삼총사 효과’를 맛본 것이 아니라, 제목이 닦아 놓은 해석의 길을 따라 작품을 즐긴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국을 맛보려면 장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즉 제목이 감추고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이 작품을 권력적 또는 성애적으로만 읽지 않는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장생이 보여준 것은 그가 최고의 광대라는 것이다. 그는 뛰어난 줄타기 실력을 비롯해 놀이패에 필요한 온갖 재주를 갖추고 있으며, 패거리를 이끄는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왕을 가지고 노는 거야!”라고 하며 왕을 놀리는 거리극을 구상할 때 그는 돈벌이만을 생각한 게 아니라 동료들에게 ‘광대의 덕(德)’이 무엇인지를 일러준 것이다. 윤리적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인격적 능력이 덕이라면, 광대의 덕은 바로 권력을 놀림감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고의 권력을 놀릴 줄 알 때, 광대의 자질과 능력은 최고에 이를 수 있다. 장생은 또한 왕을 풍자한 죄로 의금부에 끌려가서 “왕이 보고 웃으면, 희롱이 아니잖소. 우리가 왕을 웃겨 보이겠소”라는 배짱 두둑한 제안을 할 때, 사회적 차원에서 광대극의 역설적 기능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왕을 가지고 놀 줄 아는’ 장생
뭇사람 시선받는 공길
‘놀이’에 동화한 연산
비권력적·비성애적 관점 엿보여 장생은 궁궐 안 왕의 처소 앞에서 외줄을 타며 왕에게 도전한다. 이 때 장생은 바로 왕 앞에서 마치 ‘광대들의 왕’처럼 행동한다. 그가 왕에게 벌을 받아 두 눈을 잃고 대궐 앞에서 다시 줄타기에 나섰을 때, 그는 “내가 이 궁에 사는 왕이다”라고 풍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나는 광대로 다시 태어날란다”라고 다짐한다. 장생이야말로 가장 ‘광대답다’. 그러므로 공길과의 관계에서도 장생은 성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광대로서 공길을 사랑한다.
공길은 한 마디로 그 자체로 ‘광대이다’. 하지만 장생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이 정말 광대임을 자각해 간다. 공길은 중성의 매력과 마력을 지닌 인물이다.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면서도 그를 탐한다. 이는 그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이도 저도 아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남자와 여자 모두이기 때문이다. 중성의 매력이란 엄밀히 말해 양성합일의 매력이다. 그 역설적인 풍요함과 완벽함을 뭇사람들이 탐하는 것이다. 공길은 ‘모든 것’을 상징하는 자, 그래서 뭇사람의 시선을 받는 자, 곧 그 자체로 광대이다. 이는 공길의 존재적 조건이다. 공길은 광대로서의 정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지켜야 한다. 광대의 몸은 에로틱한 시선의 대상일지언정 성욕 해소의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길은 바로 이 점을 장생을 통해 깨달아 간다. 그래서 왕에게 불려가서도 인형극과 그림자극을 연출하며 끊임없이 광대의 역할을 계속한다. 드디어 마지막 운명의 줄타기에서 다시 태어나도 광대로 태어나겠다는 장생의 말에, 공길은 “나야, 두 말할 것 없이 광대! 광대지!”라고 울부짖으며 화답한다. 연산, 이 독특한 인물은 극중에서 ‘광대가 된다’. 그는 장생의 남사당패에게서 놀이가 무엇인지 터득하게 된다. 즉 광대 놀이의 재미, 놀이의 힘, 그리고 놀이의 허무함까지도 몸소 배우고 실천하게 된다. 그가 공길과 즐기는 것도 성애가 아니라 놀이이다. 연산이 공길에게 어느 순간 성애적 표현(입맞춤)을 하는 것도 놀이의 허무함에서 나온 돌발 행동일 뿐이다. 그가 공길을 불러 아이의 몸짓으로 처음 한 말 또한 다름 아닌 “놀자!”였다. 황공하다는 공길에게 “계속 놀잔 말이다!”라고 즐겁게 소리친다. 비극적 장엄함이 깔린 대단원에서 장생과 공길의 줄타기를 보며 유일하게 웃고 있는 인물 연산은 광대가 된 것이다. 장생, 공길, 연산은 탁월하고 환상적이며 독특한 인물들이다. 그들이 자질과 능력, 존재적 조건, 그리고 놀이의 의미라는 차원에서 드러내는 광대의 세계를 포착함으로써, 우리는 비권력적, 비성애적 관점에서 이 작품에 스며 있는 광대의 철학적 의미를 천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제목에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인물은 녹수이다. 하지만 ‘왕의 여자’인 그는 제목의 이면에 밀착해 있다. 그러면서 그는 앞의 세 인물과 대척점에 있다.
장생, 공길 그리고 연산이 각각 광대답게, 광대로서 그리고 광대가 됨으로써 광대의 삶을 진하게 경험하는 것과 달리, 녹수는 유일하게 광대의 세계에 뛰어들지 못하는 인물이다. 왜 그럴까? 그는 ‘정치’를 하려 하기 때문이다. 녹수는 장생을 경계하고 공길을 질투하며 연산을 차지하려 한다. 그래서 음모를 꾸민다. 앞에서 표현하지 않고 뒤에서 기만하는 것이다. 이런 정치적 행위는 광대의 본질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우리가 <왕의 남자>를 정치철학적 맥락에서 의미 있게 읽어볼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녹수라는 인물을 통해서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 대척점에 있는 광대의 세계를 좀 더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김용석/영산대 교수 anemos@as.ac.kr
뭇사람 시선받는 공길
‘놀이’에 동화한 연산
비권력적·비성애적 관점 엿보여 장생은 궁궐 안 왕의 처소 앞에서 외줄을 타며 왕에게 도전한다. 이 때 장생은 바로 왕 앞에서 마치 ‘광대들의 왕’처럼 행동한다. 그가 왕에게 벌을 받아 두 눈을 잃고 대궐 앞에서 다시 줄타기에 나섰을 때, 그는 “내가 이 궁에 사는 왕이다”라고 풍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나는 광대로 다시 태어날란다”라고 다짐한다. 장생이야말로 가장 ‘광대답다’. 그러므로 공길과의 관계에서도 장생은 성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광대로서 공길을 사랑한다.
공길은 한 마디로 그 자체로 ‘광대이다’. 하지만 장생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이 정말 광대임을 자각해 간다. 공길은 중성의 매력과 마력을 지닌 인물이다.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면서도 그를 탐한다. 이는 그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이도 저도 아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남자와 여자 모두이기 때문이다. 중성의 매력이란 엄밀히 말해 양성합일의 매력이다. 그 역설적인 풍요함과 완벽함을 뭇사람들이 탐하는 것이다. 공길은 ‘모든 것’을 상징하는 자, 그래서 뭇사람의 시선을 받는 자, 곧 그 자체로 광대이다. 이는 공길의 존재적 조건이다. 공길은 광대로서의 정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지켜야 한다. 광대의 몸은 에로틱한 시선의 대상일지언정 성욕 해소의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길은 바로 이 점을 장생을 통해 깨달아 간다. 그래서 왕에게 불려가서도 인형극과 그림자극을 연출하며 끊임없이 광대의 역할을 계속한다. 드디어 마지막 운명의 줄타기에서 다시 태어나도 광대로 태어나겠다는 장생의 말에, 공길은 “나야, 두 말할 것 없이 광대! 광대지!”라고 울부짖으며 화답한다. 연산, 이 독특한 인물은 극중에서 ‘광대가 된다’. 그는 장생의 남사당패에게서 놀이가 무엇인지 터득하게 된다. 즉 광대 놀이의 재미, 놀이의 힘, 그리고 놀이의 허무함까지도 몸소 배우고 실천하게 된다. 그가 공길과 즐기는 것도 성애가 아니라 놀이이다. 연산이 공길에게 어느 순간 성애적 표현(입맞춤)을 하는 것도 놀이의 허무함에서 나온 돌발 행동일 뿐이다. 그가 공길을 불러 아이의 몸짓으로 처음 한 말 또한 다름 아닌 “놀자!”였다. 황공하다는 공길에게 “계속 놀잔 말이다!”라고 즐겁게 소리친다. 비극적 장엄함이 깔린 대단원에서 장생과 공길의 줄타기를 보며 유일하게 웃고 있는 인물 연산은 광대가 된 것이다. 장생, 공길, 연산은 탁월하고 환상적이며 독특한 인물들이다. 그들이 자질과 능력, 존재적 조건, 그리고 놀이의 의미라는 차원에서 드러내는 광대의 세계를 포착함으로써, 우리는 비권력적, 비성애적 관점에서 이 작품에 스며 있는 광대의 철학적 의미를 천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제목에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인물은 녹수이다. 하지만 ‘왕의 여자’인 그는 제목의 이면에 밀착해 있다. 그러면서 그는 앞의 세 인물과 대척점에 있다.
김용석/영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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