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교과별 독서 지도는 학생들에게 또 다른 공부 부담을 주는 일이 돼 버릴 가능성이 크다. 학생들이 자기 수준에 맞는 책을 자발적으로 골라 읽을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일이 무엇보다 앞서야 한다. 어린이도서관연구소 제공
독서도‘지침’대로? 흥미 살리는 게 먼저! 서울시교육청이 지난달 22일 펴낸 ‘교과별 독서 지도 매뉴얼’이 최근 교육계의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이 지침서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교 1학년까지 학년·단원·주제별로 독서 지도 방안과 독서 지도를 활용한 교수·학습과정안, 독서 활동 프로그램, 교과 관련 추천 도서 목록 등을 담고 있다. 처음으로 교과별 독서 교육이 실시되면서 일부에서는 독서 교육이 학교 교육과 거리가 있어 온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들뜬 기대도 한다. 또 그동안 입시 위주 교육에 짓눌려 졸업 후의 진로 결정이나 평생교육과 연계되지 못했던 학교 교육의 실효성을 높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교육청과 일부의 기대와 달리 학교 현장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겉으로 드러난 취지와 달리 공정택 교육감이 취임하면서 밝힌 ‘학력 신장 방안’의 주요 추진 과제로 철저한 준비 과정 없이 성급하게 독서 교육이 추진되고 있다는 비판이 강하다. 독서 교육이 대학입시와 맞물린 평가와 연결되면서 또 하나의 사교육 시장을 형성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자발적 독서 싹 자를 수도 매뉴얼을 보면 단원별로 학생에게 어떤 책을 읽게 하고, 그 책에서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고, 지도 방법은 어떤 게 있고, 평가는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소개돼 있다. 매뉴얼만 봐서는 또 다른 교과 시간을 따로 만들지 않으면 수업이 불가능할 정도다. 추천 도서 수도 방대하다. 단원별로 4∼5권은 기본이고 10권이 훨씬 넘기도 한다. 서울시내 한 고교의 김아무개 교사는 “학생들이 이 정도 책을 다 소화한다면 대학 교육이 굳이 필요 없을 것 같다”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현장 교사들은 모든 교과가 일률적으로 책을 몇 권 읽힌다는 식으로 독서 교육을 진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입을 모은다. 동기 유발이 되지 않은 채로 억지로 책을 읽게 하거나 독후 활동을 요구한다면 학생들은 기존의 학업에다 독서 부담까지 안게 돼 큰 부담감을 느낄 것이란 얘기다.
혜화여고 안석재 교사는 “단기간에 성과를 내겠다는 생각이나 모든 학생에게 모든 단원에서 동일한 방식, 동일한 목록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독서 교육이 진행된다면 학생들은 독서에 대해 싫증을 내고 지쳐 버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홍천 석화초등학교 변미라 교사는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학생들에게 흥미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의미있게 읽는 경험을 제공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입시 교육 될라 독서 교육의 취지가 제대로 구현된다면 책 읽기는 과목별 사고의 활성화와 함께 독서 습관의 형성, 관련 과목의 책을 적극적으로 더 찾아 읽으려는 의욕의 형성 등으로 연결돼야 한다. 그러나 현재 상황으로 봐선 이 매뉴얼이 단순히 교과 교육의 연장, 즉 학습 교재 또는 시험에 낼 지문 따위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서울시교육청이 2007년부터 독서 기록을 대입 전형 자료로 활용한다는 교육부 방침과 관련해 수행 평가 등을 통해 성적으로 반영하겠다는 내부 방침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울시내 주요 학원가에서는 서울시교육청 추천 도서 목록을 발빠르게 입수해 요약식 독서 특강을 잇따라 개설하고 학생들을 꾀는 상황이다. 속독 훈련과 같은 기능적 차원의 독서 사교육이 확산될 가능성도 크다. 서울 숭문고 허병두 교사는 “교과서 지문의 확대에 불과한 독서 교육을 하겠다는 생각이라면, 교과별 독서 교육 자체가 존속하기도 힘들고 기존의 독서 교육이 일구어 온 성과마저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서울 구룡중 서미선 교사도 “독서 능력 평가란 인간 능력 평가만큼이나 어렵다”며 “성적과 연결된다면 학부모들은 ‘아 역시 독서논술학원에 보내야 되는구나’ 라며 학원을 찾아 헤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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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편일률 방식
아이들 부담만 늘릴 수도
시 교육청 성적 반영 방침
시험 지문으로 활용할 땐
또 다른 사교윳 불 붙일 우려
책 선정 눈높이 맞추려면 교사 학생 학부모 참여 필요
학교 도서관 좋은 책 늘리고
전문 인력 배치 서둘러야 ■과연 추천할 만한 책들인가 서울시교육청 독서 지도 매뉴얼 작업에 참여했던 한 교사는 “학생의 개별적인 선호도, 이해 능력 등에 따라 읽을 수 있는 책의 기준은 다 다르기 때문에 추천 도서 목록 제시는 하지 말자고 요청했지만 담당 장학사가 일방적으로 집어넣었다”고 털어놨다. 이는 책 선정의 공정성 시비를 불러일으킬 빌미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출판 전문가들은 초등학교 3학년용으로 선정된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중·고생에 더 맞고, 고1용으로 제시된 <역사란 무엇인가>는 대학생 수준에서 읽을 수 있는 깊이의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산시교육청 김숙정 장학사는 “적절한 책 선정은 교사, 학생, 학부모가 평생 동안 자율적으로 해야 할 일로, 설사 목록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참고 자료 이상이 되면 안 된다”며 “학년별로 제시된 책을 제대로 소화할 능력이 없는 학생들에겐 독서 교육이 또 다른 부진을 가져오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고교 논술잡지인 <독서평설>의 강현철 편집장은 “공신력과 파괴력이 있는 기관에서 좋은 책, 읽어야 할 책, 이런 식으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 단행본 시장이 편중되고 서열화될 것”이라며 “이는 지금도 빈약한 초·중·고생 대상 출판 시장을 더 왜곡할 소지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독서 여건 조성이 먼저 현재 전국 초·중·고 도서관 설치 비율은 86.5%에 이른다. 하지만 막상 도서관을 둘러보면 학생들이 읽을 만한 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 장서 수가 적은데다, 오래된 책이 많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서관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전문 사서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 학교에 도서관이 있으면서도 독서 교육의 좋은 방법인 도서관 수업은 거의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동국대부속고 신현숙 교사는 “학생 수가 1500명이나 되는데 도서관은 20평에 불과해 도서관에서 읽고 토론하는 수업을 할 엄두를 못낸다”고 말했다. 어린이도서관연구소 한상수 소장은 “도서관을 잘 지어 놓고 좋은 책들을 많이 가져다 놓은 뒤 전문 인력이 독서 안내를 한다면 독서 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이게 될 것”이라며 “서울시교육청의 독서 교육 정책은 앞뒤가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박창섭 기자 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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