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개학한 지 한 달이 지났다. 표정에서 긴장이 걷히고, 이제는 서로 익숙해져 주고받는 인사도 한결 살가워졌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존재감을 세우려는 ‘몸짓’들은 갈수록 치열해서 교실에 활력을 살려 내고 있다. 덕분에 수업 도입부에 실시하는 ‘돌아가며 명언 쓰기’도 조금씩 재미가 붙고 있다.
사실, 교사에겐 수업 도입부가 참 고민스럽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이런저런 사설을 늘어놓다 보면 수업의 맥을 놓치기 일쑤다. 그래서 올해 도입한 방법이 ‘돌아가며 명언 쓰기’다. 그러니까 하루에 한 명씩 자신이 좋아하는 글귀(좌우명이어도 좋고, 가슴에 새기고 있는 명언이나 시구여도 좋다)를 소개하는 것으로 수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친구 소개와 훈화를 겸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처음엔 국어과 학습 취지를 살려 본인이 직접 소개하는 형식으로 진행할까 싶었는데, 아이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듯하여 일단은 내가 대신하고 있다. 아이들이 쪽지에 써서 칠판이나 교탁에 붙여 놓으면 내가 그것을 칠판에 크게 옮겨 쓰면서 예화를 곁들여 소개하는 형식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업을 맡고 있는 네 학급에서 50여 종의 명언이 소개되었는데, 그 내용이 어찌나 다양한지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어디서 그런 멋진 글귀를 찾아냈는지 깜짝깜짝 놀랄 지경이다. ‘죽도록 공부해도 죽지 않는다’ 같은 익살스런 결심을 내세우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 같은 노자류, 혹은 ‘오랫동안 꿈을 그린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있다’ 같은 의지적인 인생관을 달고 나오는 아이도 있다.
기껏해야 5분 남짓의 시간이지만, 이런 통로를 통해 새삼 아이들의 가파른 성장을 실감하게 된다. 지난해 입학할 때만 해도, 콩알만 하던 녀석들이 한두 해 사이에 이렇게 몸과 마음이 부쩍 큰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자신이 내건 ‘말씀’을 따라가지는 못할 터다. 하지만, 자신이 지향해야 할 가치를 발견하고 깃발을 꽂았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대견한 성장인가.
어제는 한 녀석이 이런 글귀를 소개했다. ‘내가 죽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한 세상은 바뀐다.’ 참으로 푸르고 당당하다. 아이들의 좌우명 쪽지를 보노라면 마치 그들의 순결한 가슴에 내걸린 이름표를 만나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지긋지긋하게 말을 안 듣는 녀석이라도 이런 때는 기특하기 짝이 없다. (아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교실로 향하는 이 늙은 선생의 발걸음이 약간 기대감에 들떠 있는 것도 다 그 덕분이다.
이상대/서울 신월중 교사 applebighea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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