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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거울은 존재 인지하게 만드는 통로

등록 2007-10-07 16:15

인류문명과 함께 해온 거울은 사람의 내면과 외면 사이의 경계를 보여주는 도구다. 한겨레 자료사진
인류문명과 함께 해온 거울은 사람의 내면과 외면 사이의 경계를 보여주는 도구다. 한겨레 자료사진
권희정교사의 삶, 사유, 논술 / 난이도 수준- 고2~고3

대입 수시모집 원서를 업고 들이닥친 쓰나미가 지나갔다. 수능시험이 코 앞이지만, 원서를 쓴 학생들은 그보다 더 큰 산맥을 먼저 등반했다. ‘자기 소개서’와 ‘추천서’. 그동안 쌓아온 삶의 내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거울이다. 열여덟의 나이테를 정리하기가 왜 그리도 힘들었을까. 몸과 마음을 성찰하고 내 삶을 들여다 보는 일, 실로 공부보다 벅차다.

이럴 때 ‘업경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염라대왕 앞에 갔을 때 죽은자의 한 평생을 환히 보여준다는 거울이다. 자기 소개서도 ‘인간 아무개’를 형성한 인생의 메아리이다. “너 자신을 알라”던 소크라테스의 일갈은 입시부터 사후세계에 이르기까지 ‘영혼의 거울’을 피해갈 수 없다는 영원한 화두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사물을 비추어주는 거울은 인류 문명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아이콘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는 샘물에 반사된 자신의 이미지에 도취된 채 죽어갔다. 물 위에 뜬 자기 모습을 분신으로 여겨 살아있는 존재라 믿은 탓이다. 샘물은 거울의 신화적 표현이다. 누구나 마음 한 켠에는 ‘나에 대한 편애’가 있는 법. 신화에서 자아에 이르기까지 거울은 재미있는 이야기 보따리이다.

그러니 철학이 이 중요한 주제를 놓칠 리가 없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은 감각기관으로 알게 된 사물들은 헛된 그림자라 여겼다. 이데아계만이 오직 살아있는 원본들의 진짜 세계다. 그런데 눈으로 본 거울상은 진짜도 아니고 영원하지도 않다. 심지어 거울의 표면은 눈을 부시게 하고 굴곡지게 만들기도 한다. 그는 <국가>에서 거울의 반사상은 존재를 왜곡하는 환상일 뿐이라 비난했다.

하지만 불완전한 거울의 반사상은 이데아계의 증거이기도 하다. 거울 속의 가짜를 보면서 나를 깨닫듯, 눈으로 본 현상을 통해 원본의 존재(이데아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거울 너머’에 있을 법한 또 다른 비물질적인 세계! 어린 시절, 누구나 거울을 보면서 앨리스처럼 거울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에 야릇했던 경험이 있으리라. ‘내가 지금 거울 표면을 보는 것일까, 아니면 그 너머를 보는 것일까’ 거울은 원본을 모방하고 새로운 세계를 유추해 우리들의 영혼을 상상의 세계로 끌고 간다.


거울은 도덕적 선악의 상징성도 함께 갖고 있는 복합물이다. 창세기에 의하면 인간은 “신의 형상에 따라 그 모양대로” 만들어졌다. 오직 신만이 ‘빛나는 거울’이며, 성경은 “흠 없는 거울”(잠언)이다. 신의 모방품인 우리는 신의 본연을 만나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원죄 때문에 흐려진 눈을 깨끗이 하고 선한 영혼을 가지라고 강조했다. 중세의 화가들이 ‘거울을 든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즐겨 그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편, 거울은 빠져드는 듯한 ‘최면’이나 ‘도취’의 느낌을 준다. 중세시대의 거울은 평평하지 않아 사물이 이상하게 보였다. 여기에 주술적 상상이 가미되어 거울점 등이 생겨났는데,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호기심’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 이성의 흔적으로 여겨졌다. 당연히 중세의 종교재판에서는 이런 ‘마녀의 거울’을 용납하지 않았다. 악마의 도움을 요청하여 신에게 도전하는 행위로 본 탓이다. 서양 만화에서 주술사들이 유리 구슬로 점을 치는 모습은 거울의 상징을 종합적으로 차용한 내력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거울은 진짜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진실을 숨기고 삐딱하게 반응한다.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작가 이상은 ‘거울’에서 나와 거울이 낯선 관계라는 점을 말하며 자아의 분열을 표현했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장생과 공길은 거울관계를 상징한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둘은 맹인 놀이를 하며 계속해서 손을 맞잡으려 애를 쓴다. 그러나 결국 엉뚱하게 부딪쳐서야 만나는 그들처럼 우리의 자아는 실제 나와 만나려할 때 곧잘 미끄러진다.

게다가 거울 속의 자신은 보는 자의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 시몬느 베이유는 말한다. “아름다운 여인은 거울을 보고 자신이 바로 그 모습이라 생각하지만, 못생긴 여인은 그게 다일 수가 없다는 것을 안다.” 백설공주의 계모도 “거울아 거울아”를 부르며 자신의 결핍된 아름다움 때문에 절망한다.

나의 무의식은 ‘상상하는 나’를 꿈꾸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은 그와 다르다. 프랑스 철학자 라깡은 실제 나와 거울상의 불일치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그러니 내가 생각하고 내가 판단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울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게 만드는 통로이기도 하다. 라깡은 거울을 이용해 어린아이가 자기를 깨닫는 과정을 설명했다. 어린 아이는 자신의 몸을 통일된 신체로 인식하지 못한다. 입 따로, 팔 따로, 다리 따로 경험하는 식이다. 그러나 ‘조각난 신체’가 흩어져 있다는 환상은 ‘실제 나’와 ‘거울 속에 비친 나’를 오가면서 결국 내가 단일한 신체임을 알게 된다. ‘거울 단계’는 불안한 인간 정신이 자아를 통일적으로 인식하는 필수 과정인 셈이다.


권희정 교사의 삶, 사유, 논술
권희정 교사의 삶, 사유, 논술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거울을 들여다 본다. 거울 없는 교실, 거울 없는 화장실은 없다. 게다가 여학생들의 책상에는 핸드폰과 거울이 나란히 놓여 있다. 엘리베이터 안에 거울을 설치한 후에야 속도가 느리다는 사람들의 불평이 없어졌다고 한다. 거울은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하는 성찰의 문이며, 타인의 눈을 경험시켜 주는 카메라다.

그런데 뱀 머리카락을 가졌던 흉측한 메두사는 페르세우스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돌이 되었다 한다. 어쩌면 ‘진짜 나’를 보았을 때, 공포나 부끄러움에 몸서리를 치지 않을지도 걱정이다. ‘도취’와 ‘공포’는 모두 자기 몰두의 자식들이니.

사람들은 저마다 거울에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 저 너머의 내면인가, 타인의 눈인가, 아니면 외모의 치장인가. 무엇이든 예민하다는 사춘기에 매일 보는 거울. 비록 그 속의 자신과 악수할 수는 없더라도 그대들의 젊은 호기심으로 끊임없이 대화중이리라 기대해 본다 .

권희정 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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