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의 우리문화 우리역사
옛 문화 떠올리는 계기되길
최근 산책로를 개방하는 왕궁의 숫자를 늘린다는 보도가 있었다. 2004년에 시작된 왕궁 산책로 개방의 효과에 힘입어, 보존만 하던 것에서 보존과 활용의 적절한 조화를 모색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겠다는 취지이다.
왕실 무덤은 주변에서 비교적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문화유적이다. 조선시대 왕실의 무덤에는 해당 주인공의 신분에 따라 다른 이름이 붙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 임금의 친아버지, 세자와 세자빈의 무덤은 ‘원’, 왕자와 공주, 후궁의 무덤은 ‘묘’라고 했다. 27대의 왕과 왕비, 본래는 왕이 아니었지만 죽은 뒤 왕으로 받들어진 왕족과 그 부인을 포함해 모두 44기의 능이 조성돼 있다.
서울이 도읍이었던 조선시대 왕릉은 거의 대부분 서울과 그 인근 지역에 남아 있다. 태조와 정종의 왕비 무덤이 개성에 있어서 가 볼 수 없으며, 귀양지에서 죽은 단종의 무덤이 영월에 있을 뿐이다. 그 밖에는 서울에서 멀어 보아야 여주나 화성 정도이다. 특히, 태조 이성계 무덤을 비롯해 9개 능에 17명의 왕과 왕비가 묻혀 있는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 예종의 무덤을 비롯해 5개 능에 9명의 왕과 왕비가 묻혀 있는 고양시의 서오릉, 인종의 무덤을 비롯해 3개 능에 5명의 왕과 왕비가 묻혀 있는 서삼릉에는 왕자나 후궁의 무덤도 함께 있어서 왕실 무덤군을 이루고 있다.
왕릉은 보통 풍수지리상 가장 좋은 땅에 자리잡는다. 왕릉 터를 고를 때는 임시 관청을 만들어 풍수지리설에 따라 후보지를 선정하고 조정 고위 관리들의 추천에 따라 정했다. 때로는 왕이 직접 현지를 답사하기도 할 정도로 왕릉 터를 고르는 작업은 국가의 중대사였다. 왕릉 터 안에서도 명당의 기운이 모이는 ‘혈’에 관을 넣고 봉분을 쌓았다.
능의 입구에는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 붉은 칠을 한 홍살문을 두었으며, 홍살문을 들어서면 무덤에 참배를 하러 가는 길인 참도가 이어진다. 무덤 앞에는 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이 있으며, 그 주변에 능의 주인에 대해 기록해 놓은 비석이 위치한 비각과 음식을 만드는 수라간, 제사에 필요한 비품을 보관하는 수복방 등 부속 건물들이 있다.
무덤은 왕과 왕비의 것을 별도로 조성하는 경우도 있고, 나란히 배치하는 경우도 있으며, 함께 묻는 합장을 하기도 한다. 봉분은 그냥 흙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지만, 12각형의 돌로 아랫부분을 둘러서 보호하는 호석이 있는 경우도 있다. 봉분 주위는 돌로 둘러싸서 보호를 하고, 다시 그 주변에 담장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관을 쓴 문인석과 검을 들고 있는 무인석이 있으며, 그 뒤에는 돌로 된 말을 배치하였다.
한동안 왕릉은 주로 학생들의 소풍 장소로 이용되었다. 근래에는 그마저도 줄어들었다. 산책길의 개방이 사람들이 왕릉을 더욱 즐겨 찾고, 또 거기에 담겨 있는 옛 문화의 흔적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한국교원대 교수
한동안 왕릉은 주로 학생들의 소풍 장소로 이용되었다. 근래에는 그마저도 줄어들었다. 산책길의 개방이 사람들이 왕릉을 더욱 즐겨 찾고, 또 거기에 담겨 있는 옛 문화의 흔적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한국교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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