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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삶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다

등록 2007-12-23 15:30수정 2007-12-23 15:45

박용성 교사의 인문사회 비타민
박용성 교사의 인문사회 비타민
박용성 교사의 인문사회 비타민 /

[난이도 = 고등]

■ 교과서 훑어보기

팔과 다리가 없는 선천성 사지 절단이라는 장애를 안고 태어난 오토다케를 차마 그의 어머니에게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한 아버지와 병원 사람들은 한 달 후에야 아이를 어머니에게 보여 주었다고 한다. 모자 간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날, 대성통곡을 하다가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을 염려한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오토다케 어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온 첫마디는 “어머, 귀여운 우리 아기!”였다고 한다. ―<시민 윤리>(교육인적자원부) 70쪽

인간은 한계 속의 존재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제한되어 있다. 이러한 제한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어진 현재를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현재에 충실할 때, 행복한 미래가 주어진다. 행복한 미래는 미래를 앎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다. ―<철학>(교학사) 91쪽


■ 교과서에서 논제 찾기

생각해 보면 우리네 삶은 지겹기 짝이 없어. 이제는 대중 가요의 고전으로 불리는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우리 삶을 대변해 주고 있지. “됐어 이젠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 이젠 족해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 아이들의 머리 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는 초월적인 관념의 세계로서, 진실과 본질이 불변하는 세계야. 그런데 실상은 있지도 않은 ‘교실 이데아’를 관념과 초월의 영역에 만들어 놓고, 그곳으로 가야만 행복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교육 현실에 대해 절규하고 있어.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신들의 프롤레타리아’ 시지프스인지도 몰라. 그리스 신화에서 시지프스는 코린트의 왕으로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이었어. 어느 날 시지프스는 제우스가 요정 아이기나를 납치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아이기나의 아버지인 강의 신 아소포스를 찾아가 일러바쳤지. 결국 시지프스는 분노한 제우스한테서 가혹한 형벌을 받았어. 그 형벌은 높은 바위산 위로 큰 바위를 밀어 올리는 것인데, 올려놓으면 다시 굴러 떨어져 또 다시 밀어 올려야 했지.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 있어. 올려놓으면 또 떨어지는 바위,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다시 바위를 밀고 산을 올라야 하는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자 이 땅의 노동자들의 모습이야. 텔레비전의 광고에서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하고 말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삶을 이 땅의 노동자들은 강요받고 있어.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노동의 순환 속에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면, 그러한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이것이 바로 삶의 부조리야. 카뮈는 시지프스에게서 ‘일생 동안 날마다 같은 일’만을 되풀이하는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발견하고서 그들을 ‘신들의 프롤레타리아’라고 불렀던 거야.

가끔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고백하고 싶을 때가 있지. 자살(自殺)은 인생의 궁극적인 존재의 이유가 사라져 버렸을 때, 바쁜 하루하루 삶이 온통 허무하다고만 생각될 때,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이 무의미하다고 여겨졌을 때, 인간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야. 그러나 카뮈는 자살을 곱게 보지 않았어. 자살은 ‘나와 세계’가 대립하는 부조리한 삶에서 나를 말살시킴으로써 부조리한 삶에 굴복하는 도피 행위일 뿐이라는 거야.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없을까? 희망(希望)을 찾는 방법이 있다고 카뮈는 말했어. 그런데 이 방법 역시 부조리한 삶에 올바르게 대응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말해. ‘희망’조차 문제가 있다고 하면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카뮈는 ‘나’ 아닌 다른 것에 거는 희망은 거짓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야.

흔히들 백마 타고 온 왕자가 나타나 “자기, 타” 하는 몽상에 젖어 사는 소녀를 가리켜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빠져 있다고 하지. 하지만, 만약 그 왕자가 저 푸른 초원을 달리다가 갑자기 “자기, 내려” 하면 어찌할 거야? 그래서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거는 것은 올바른 대응 방법이 아니라는 거지.

그 ‘다른 것’이 사람이 아닌 어떤 초월적인 존재인 신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야. 지금의 삶의 테두리를 벗어난 딴 세계의 약속에 기대를 거는 것은 부조리한 삶을 도피하는 자기 기만이야. 부조리한 현실을 외면하는 종교적 위안 또한 자살과 마찬가지로 매도되어야 할 행위에 지나지 않아.

그렇다면 부조리한 삶에 대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선, 카뮈는 인간은 부조리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어. 아무리 세상이 말이 안 되어도 ‘아, 이 세상 부조리하다’면서 자살하는 동물은 없어.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카뮈가, 부조리는 도달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라고 강조한 까닭이 여기에 있지.

부조리란 인생에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지만, 이 말의 배후에는 생명에 대한 강한 긍정이 도사리고 있어. 여기에서 “나는 반항(反抗)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카뮈의 그 유명한 말이 나와. 카뮈는 삶의 무의미함에 대응하여 요구되는 것이 ‘반항’이라고 했어.

반항이란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로 인식된 자신의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행동이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시지프스가 위대한 이유는 자신의 노력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의식’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고, 동시에 그 운명에 맞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기’ 때문이지. 왜 카뮈가 부조리한 삶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하여 바위를 들어 올리는 시지프스를 ‘신들의 프롤레타리아’이자 ‘부조리의 영웅’이라는 찬사를 보내는지 알 수 있을 거야.

부조리함이 인간만이 느끼는 삶의 실존적 조건이라면, 회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태도야말로 ‘인간다움’의 전형이야.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은 역설적으로 ‘삶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거든.

<교과서와 함께 구술 논술 뛰어넘기> 저자, 여수여고 교사

위 논제와 관련된 기출 문제(1998학년도 한국외대 논술 문제)는 인터넷 한겨레(www.hani.co.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본지에 연재되고 있는 기출 문제에 대한 박용성 선생님의 동영상 강의는 전라남도교육정보원(www.jnei.or.kr)에 들어가 ‘인터넷교육방송→고교논술→실전논술’순으로 검색하면 무료로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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