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국력’ 정말 그럴까
‘영어=국력’ 정말 그럴까
민족사관고의 기숙사 엘리베이터에는 ‘영어 상용의 목적’이라는 글귀가 교훈과 나란히 새겨져 있다. ‘영어는 앞서가는 선진 문명ㆍ문화를 한국화하여 받아들여 한국을 최선진국으로 올리기 위한 수단이며 그 자체는 결코 학문의 목적이 아니다’라는 글귀는 영어를 일상어로 쓰는 민사고 학생들이 영어 교육의 참 의미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민사고의 학생들은 매주 월요일 조회 시간에 이 글귀를 함께 암송한다.
그러나 인수위의 영어 정책을 보면 ‘영어는 수단일 뿐이다’라는 점을 망각한 것처럼 보인다. 민사고 선배들이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인정받아 온 이유는 단지 영어를 잘하기 때문이 아니다. 다양한 동아리 활동과 봉사활동 등의 경험을 통해 그들만의 장점을 계발해 왔기 때문이다. 중요한 ‘목적’이 돼야 할 것은 영어가 아니라 개인의 재능을 계발하는 일이다.
교육정책을 만드는 이들이 마땅히 ‘수단’이어야 할 영어를 ‘목적’으로 인식하는 순간, 다양한 재능이 공존하는 인재 풀은 존재할 수 없게 되며 그것은 곧 국가 경쟁력의 하락을 의미한다. 영어에 터무니없을 정도의 가중치를 두는 사회에서 경쟁의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스스로를 정형화시킨 인재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리 없기 때문이다.
민족사관고의 선배들이 미국 대학에서도 탐내는 경쟁력 있는 인재로 성장해 온 이유는, 흔히 알려진 모교의 영어 몰입교육정책 때문만이 아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토론식 교육과 질 높은 인문사회 강의를 통해 모국어로 획득한 탄탄한 논리력 위에 영어 능력을 쌓아 올렸기 때문이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통해 쌓아 올린 논리적 구성능력 없이 경쟁력 있는 영어를 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불행하게도, 현재 대한민국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의 재능을 계발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할 수도, 논리적 사고력을 신장시킬 수 있는 교육을 받을 수도 없다.
이런 교육의 기본마저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영어 교육을 강화해 국가 경쟁력을 향상시키겠다는 인수위의 방침은, 모국어를 통해 나이에 걸맞은 지적 능력을 쌓고 자신의 재능을 탐색해야 할 아이들을 영어에만 매달리게 함으로써 결국 이 나라의 미래를 파괴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영어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차기 정부의 주객전도식 교육관으로 말미암아 앞으로의 미래가 ‘잃어버린 100년’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신유정 민사고 졸업ㆍ고려대 정경학부 입학

신유정 민사고 졸업ㆍ고려대 정경학부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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