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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다르다 깔보는건 못난 일이잖아요?

등록 2008-08-03 16:48

마리아양은 실명을 쓸 수도, 사진을 찍을 수도 없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자녀라는 불안한 신분 때문이다. 사진은 마리아양과 함께 ‘2008 세계시민학교’에 참여한 학생들.  〈월드비전〉 제공
마리아양은 실명을 쓸 수도, 사진을 찍을 수도 없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자녀라는 불안한 신분 때문이다. 사진은 마리아양과 함께 ‘2008 세계시민학교’에 참여한 학생들. 〈월드비전〉 제공
이주가정 소녀 ‘세계시민 캠프’ 가다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고 놀리는 친구들
학교생활 5년 힘들었지만 이젠 자신감
외교관 되어 차별·편견 날려버릴래요”
지난달 29일 늦은 저녁, 경기도 양평학생야영장 대강당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예닐곱씩 둘러앉아 ‘외국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일’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이들은 ‘2008 세계시민학교 지도밖 행군단’에 참가한 청소년들이었다. 언어를 배워야 한다, 음식에 익숙해져야 한다, 다양한 얘기가 많았지만 쐐기를 박은 것은 직접 경험을 털어놓은 마리아(가명·16)양이었다. “사실 내게는 한국이 외국인데, 처음에는 어떤 노력도 통하지 않았어. 적응하는 데는 노력보다 시간이 약인 것 같아.”

마리아가 한국에 온 것은 2002년 4월이다. 방글라데시에서 부모님과 남동생 모두 함께 이주해 왔다. 10살 때의 일이다. 학교는 당장 다니지 못하고 1년 뒤부터 다녔다. 11살이라고 4학년에 배정됐다. “첫해는 말도 서툴고 성적이 좋지 않았어요. 학년말에 담임 선생님이 4학년을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중학교에 가서 고생한다며 다시 다니라고 했을 때 너무 자존심이 상했어요.” 읽고 쓰는 일조차 버거운 마리아를 위해 수업 뒤 단 한 시간도 따로 시간을 내지 않았던 교사였다. 전교생 20여명의 작은 분교, 종종 본교로 외출이 있을 때면 자신을 떼어놓고 가려고 애쓰던 교사의 모습만 상처로 남았다.

그래도 그는 초등학교 시절이 행복했다고 주저없이 말한다. 또다시 다니게 된 4학년, 그때 만난 담임교사 덕이다. “작은 일이라도 절 꼭 참여시켜 주셨어요. 말이 서툴렀지만 발표도 하고 과학 실험을 할 때엔 조장도 맡았어요.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물론 당시의 담임교사도 마리아를 위해 따로 상담을 하거나 일대일 학습지도를 하는 등의 특별한 배려는 하지 않았다. 한국말이 서툰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다녀오는 일도 허용하지 않았다. 교사는 수업을 빼먹고 병원에 다녀온 마리아에게 “이런 식으로 공부할 거면 가족들 뒷바라지나 하지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크게 화를 냈다. 그 뒤로 부모님도 마리아의 학교생활을 존중하기 시작했다. 수업을 놓치는 일이 없어졌다.

학교생활은 물론 공부에도 자신감이 붙자 꿈이 생겼다 . 중학교 1학년 무렵, 한국 친구들도 선망하는 외고나 국제고에 진학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외교관이나 한국무역센터 같은 데서 일하고 싶어졌어요. 그 정도 지위가 되면 나를 무시했던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영어가 중요하다고 해서 집 근처에 사는 필리핀 사람들과는 일부러 영어로 대화한다. 내신성적은 아직 한참 모자란다. 360명 가운데 100등 정도다.

마리아가 외고나 국제고를 가고픈 이유가 또 한 가지 있다. 차별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다양한 언어를 배우고 국제적인 공부를 하는 곳이면 피부색이 다르다고 무시하거나 따돌리지 않을 것 같아요.”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강대국의 언어를 배우는 외고나 국제고의 커리큘럼을 무색하게 만드는 ‘순진한’ 기대다. “엄마는 제게 거는 기대가 큰데 성적이 안 올라서 큰일”이라며 울상을 짓는 마리아는 그러나 학원 한 군데 다니지 않고 인터넷 강의를 활용하지도 않는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 때문이다.

사실 그는 요즘 꿈꿀 기회조차 빼앗길까봐 걱정이 많다. 마리아의 어머니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다.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미 아버지는 1년만인 2003년 이웃의 신고로 한국을 떴다. 자진신고하고 방글라데시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한국과 다른 고국의 학제 때문에 또 몇 해를 낭비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이 걸린다. 방글라데시의 교육과정은 6살에 입학해서 15살에 10학년을 마치고 16살에는 대학에 진학한다. “저랑 동갑인 사촌은 이미 수능과 같은 대학 입학 시험을 보고 내년이면 대학에 가요. 저는 시험 칠 자격을 얻기 위해서라도 분명 9학년이나 10학년부터 다시 다녀야 할 거예요.”

타국의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마리아는 주눅들지 않는다. 차이를 강조하고 차별이 일상화한 사회를 사는 힘은 ‘자신감’에서 나온다. “절 친구로 인정해주는 아이들도 있지만 여전히 피부색이 다르다고 깔보고 놀리는 애들이 많아요. 그냥 나보다 못나서 그러겠거니 하고 참아요.” 특히 방글라데시가 ‘가난한’ 나라라며 놀리는 친구들을 보면 그저 한심할 뿐이다. “방글라데시가 선진국은 아니지만 무시당해도 좋은 나라는 아니에요. 다른 나라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이 진짜 필요한 것 같아요.” 교육적 지원은 이주가정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편견에 사로잡혀 차별과 배제를 일삼는 한국의 청소년에게도 필요하다는 일침이 따가웠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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