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화되자 노트북·기자재 제공 등 생존경쟁
채택 땐 참고서·문제집에서 막대한 수익 뽑아
채택 땐 참고서·문제집에서 막대한 수익 뽑아
내년부터 사용될 새 중1·고1 영어, 수학 교과서 채택을 싸고 또다시 금품 살포와 현물 지급 등 불법 로비가 판을 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말로만 ‘엄단’을 외치는 사이 일부 업체들은 노트북·수업기자재 제공은 물론, 장학금을 가장한 채택료를 지급하는 등 사활을 건 로비전을 펼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미 학생 한 명당 채택료가 2만~3만원까지 급등했다”고 하소연한다.
천안에 있는 한 중학교 영어교사인 ㅇ아무개씨는 최근 한 출판사 총판업체로부터 ‘ㄱ사가 낸 검인정 교과서를 채택해주면 연간 100만~500만원씩 5년 동안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ㅇ교사는 “수량(학생 머릿수)에 따라 장학금을 차등 지급하겠다며 50~500명까지의 계산서를 뽑아줬다”고 말했다.
수원의 한 고등학교 수학교사인 ㄱ아무개씨도 서점 쪽으로부터 비슷한 제의를 받았다. ㄱ교사는 “서점 사장이 찾아와 ‘ㄴ사 교과서가 채택되면 해당 과목 선생님들에게 노트북 한 대씩을 주겠다’고 했다”며 “‘현금으로 하면 잡음이 있을 수 있으니 수업 기자재로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말까지 하더라”고 전했다.
물적 기반이 우세한 대규모 업체들의 공세가 계속되다 보니 상대적으로 ‘금전 동원력’이 약한 중소 규모 업체들은 부도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다.
ㄷ사 관계자는 “지방 총판 쪽에서 ‘현찰을 더 보내지 않으면 한 학교도 잡기 힘들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며 “출판사끼리 모여 ‘자정 결의’까지 했지만, 검인정을 통과한 업체 33곳 중 점유율이 가장 높은 8곳은 참여하지 않았다”고 푸념했다. ㄹ사 관계자는 “교과서 정가가 4천원 미만이고 이익금은 9%에 불과한데도 일부 업체들은 제작비만 1만원이 드는 홍보물과 교사용 지도서를 뿌린다”며 “이 모든 것이 불법이지만 교과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지역 한 총판 관계자는 “주임 교사가 술집에 깔아놓은 외상값까지 갚아주고, 학생 머릿수당 2만~3만원까지 채택료를 주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5년 주기로 교과서가 바뀔 때마다 채택 비리는 늘상 있어 왔다. 2006년에는 ‘교과서 채택비’ 명목으로 금품을 수수한 교사 30여명이 무더기로 적발돼 입건되기도 했다.
그러나 예전보다 이런 비리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교과부가 그동안 유지됐던 ‘교과서 공동 발행·배급’ 원칙을 깨고 교과서값 결정 방식을 바꿔 업체들의 경쟁을 강화하는 새 정책([<한겨레> 6월12일치 15면])을 추진하기 때문이다. ㅁ사 관계자는 “상위 업체 8곳은 공동 발행·배급과 이익 균등 배분을 사실상 거부했다”며 “교과서 판매에서는 적자가 나더라도 교과서 선택 여부에 따라 판매량이 좌우되는 참고서나 문제집에서 막대한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계산을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교과부는 시·도 교육청에 ‘협조 공문’을 보내는 것 외에 어떠한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있다. 교과부 관계자는 “자율화 흐름 속에서 현재 교과서 채택 비리에 관한 벌칙 조항조차 없는 상황”이라며 “학교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은 기본적으로 시·도 교육청 관할 사항이라 공문을 보내 협조를 요청한 상태”라고 말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