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연
피천득/샘터
피천득/샘터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 가락지다. …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오월이 되면 피천득 선생의 수필이 생각난다. 아니 피천득 선생의 수필은 언제나 오월을 떠올리게 한다.
선생의 수필은 맑은 시냇물 위로 퐁당퐁당 물수제비를 뜨는 조약돌이다. 물에 잠기는 듯싶다가 허공으로 튕겨 오르고, 다시 수면을 스쳐 거듭 솟구친다. 사라지는 자취 사이로 은은하게 향기가 뿌려지듯 인생의 깊은 지혜와 성찰이 깔린다. 건너편 기슭에 닿듯 가슴 깊숙이 선명한 흔적을 남긴다.
선생의 수필은 몇 가지의 소박한 재료만으로 화려하게 맛과 멋을 낸 음식이다. 읽으면서 즐겁고 덮으면서 사랑스럽다. 따뜻한 눈길이 닿아 어느덧 마음결에 아로새겨지는 감수성의 성찬이다.
선생의 수필은 소박하고 차분한 삶의 풍향계다. 언제나 먼 방향을 가리킬 뿐 인생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다. 늘 떠나지만 어느새 늘 옆에서 속삭인다. 방랑자처럼 우리 곁을 떠났다가 오래된 친구처럼 옆에서 속삭인다.
선생의 수필은 빛나는 언어의 건축물이다. 섬세하고 함축적인 구조 위에 경쾌하고 섬세한 문장들이 얹혀져 새로운 세계를 낳는다. 음운이 음운과 만나 음절과 낱말로 부드럽게 합쳐지고 구와 절로 신록처럼 펼쳐지며 인간의 숲을 언제나 푸르게 덮는다.
선생의 글은 좀처럼 공동체를 지향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연〉과 같은 아름다운 수필도 마음 편히 읽을 수 없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백 살을 바라보는 선생은 부끄럽게 뉘우친다. “그저 인생을 착하고 아름답게 살려고는 했는데, 그게 전부고…. 우리나라는 과거에 저항 운동을 해야 할 필요가 여러 번 있었어요. 근데 그걸 한걸음 나가지 못하고 뒷골목으로 다니면서 한숨 쉬고 이렇게 한 것이 지금으로(서는) 한이고 부끄럽고 그렇습니다.”(〈한국방송〉 ‘TV 책을 말하다’ 대담에서)
듣는 이 모두를 부끄럽게 하는 영원한 소년. “스물 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언제나 스물 한 살의 젊은이로 “나는 오월 속에 있다”.
허병두/서울 숭문고 교사
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교사들 대표 wisefree@dreamwiz.com ★★★인연 피천득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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