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교육

내 부모 같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등록 2008-10-05 19:37

고현숙의 학부모코칭
고현숙의 학부모코칭
고현숙의 학부모코칭 /

내가 “이제 어른이 됐구나”라고 느꼈던 때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대학 2학년 때, 동향 선배가 어느 날 이런 말을 하는 거였다. “우리 아버지를 분석해 보자면, 몰락한 농촌 출신으로 도시에 와서 천민적 자본을 축적하였고, 계층 상승에 성공한 신흥 부르주아라 할 수 있지.” 그 말이 다소 충격적이었던 것은 아버지를 거리낌없이 객관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데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분석해볼 엄두는 내지 못하였다. 분석 대신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 이해해보려고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에 대한 가장 오랜 기억은 아버지 손가락을 붙잡고 걷던 골목길이다. 왜 그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았을까? 이유가 있었다. 그날 아버지는 나에게 싼타루(샌달의 일본 발음일 거다)라 불리던 빨간 에나멜 구두를 사주신 것이다. 어려운 가정에서 그 반짝거리는 구두는 정말 꿈 같아서, 어린 나는 절로 입이 벌어졌던 것 같다. 그때 아버지는 서른 예닐곱 쯤. 나는 서른 예닐곱의 젊은 가장이 새 구두에 좋아서 뛰는 어린 딸 손을 잡고 걷는 골목길과 그 뒷모습을 상상해본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 어머니와 누이를 잃은 분이다. 배우려는 의지가 강했지만 가난 때문에 꿈을 펼칠 수 없었다.

80학번으로 한창 학생운동을 하던 나는 고향 집에 내려갈 때마다 아버지에게 열을 내면서 말했다. 광주항쟁의 진실이 뭐고, 한국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한지 등등. 설익은 주장에도 그렇게 야단치지는 않던 아버지가 한 번은 이런 질문을 했다.

“네가 지금 데모하다 연행되면 그걸로 끝이지만, 만약 변호사가 되어 그 주장을 펼친다고 생각해봐라. 어느 쪽이 사회에 더 큰 영향을 주겠느냐?” 지혜로운 말씀이었다. 비록 ‘당장 행동하고 지금 바꾸기를 원하던’ 내 열정은 동의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4학년말에 학내 시위에 연루된 나는 무기정학을 받았다. 아버지가 운동권 딸을 위해 어떻게 노력하셨는지는 훨씬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7,8년쯤 후였다. 고향집에 갔다가 서랍 깊숙이 보관된 편지들을 보게 되었다. 뜻밖에도 교수님이 보낸 편지가 있었다. 내용을 보니, 아버지가 교수님께 내 대학원 진학이 가능한지 타진한 편지에 대한 답신이었다. 이상하게도, 아니 당연한지도 모르지만, 교수님은 냉정하게 “그 아이는 학문에 뜻이 없을 뿐 아니라, 학문적 자질도 없다”고 쓰셨다. 특히 ‘학문적 자질이 없다’는 대목을 읽을 때는, 한 대 맞은 듯이 가슴이 아파왔다. 낙담하였을 아버지의 한숨이 대번에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식들 공부 잘하는 것이 유일한 자긍심이었던 아버지. 아버지는 내게 상처가 될까 봐, 그 후 누구에게도 이 얘기를 절대 입밖에 내지 않으신 것 같았다.

자식을 키우는 중년의 부모가 되어 이제 나는 나를 돌아본다. 아버지처럼 자식에게 그런 신뢰를 보이고 있는가. 실망스러울 때도 묵묵히 감내하며 자식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배려할 수 있는가. 자식에게 아버지는 넘어야 할 산이라고 한다. 넘어야 할 산이므로 더 크고 높아 보인다. 그런 부모의 모습을 그리워하게 되는 시간이다.

고현숙 한국코칭센터 대표 helen@eklc.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