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영 교사의 시사 따라잡기
국민국가 해체는 까마득한 일
민족과 국민국가에 대한 담론이 여러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동북공정과 간도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한동안 중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민족주의적 반발정서가 일더니, 올해 들어서는 일본에 대한 감정대결로 방향이 급선회하였다. 일본에서는 우익 정치인들과 극우 언론이 합작하여 재무장 정책, 영토분쟁, 역사교과서의 우편향적 수정을 부추기고 있고, 중국은 체제통합을 위해 정부가 나서서 민족주의를 장려해 왔는데, 이것이 반일 대중운동으로 폭발하고 있다. 지금은 오히려 그 수위 통제가 정부의 관심사인 모양이다. 이리하여 동기와 지향은 다르지만 동아시아 세 나라의 민족주의가 일제히 고조되고 있다. 북한의 개방 개혁 및 동아시아 국제체제로의 원만한 편입을 위해서도 세 나라의 협력이 불가결한데, 오히려 상호관계가 꼬이고 있다. 일본의 돌출적 대외노선이 일차적 원인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가 하면 다른 일각에서는 역사적 현실적 실체로서 민족 혹은 국민국가라는 단위 자체에 대한 부정론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 견해의 옹호자들은 민족주의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서 민족주의, 민족, 국민국가를 모두 한 줄에 엮어 극복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이것을 세계화 시대의 바람직한 민족 담론으로 부각시킨다. 그러나 과연 세계화 시대에는 민족과 국민국가가 용도폐기되는 것일까?
해체론자들은 유럽연합에서 민족과 국민국가의 극복을 목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유럽연합은 실은 국민국가의 극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의 전개에 대처하기 위해, 특히 미국과 일본의 경제력에 맞서기 위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할 목적으로 개편·확대된 국민국가 수립 시도를 의미한다. 민족을 근대적 형성의 산물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그것이 근대적 세계질서와 함께 사라지리라 생각하지만, 이 세상에 형성의 산물이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도 계급의식의 강화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유럽도 지금 나름대로 그 무엇인가의 ‘형성’에 열중하고 있다. 유럽의 ‘건국설화’도 만들어지고 있고 유럽의 영웅도 만들어지고 있다. 즉 유럽은 국민국가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유럽이라는 주권적 국민국가 혹은 유럽 주권 국민(민족)을 새로 만들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 민족이나 국민국가가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해체되면 전쟁도 대립갈등도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국가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국가의 성격이다. 국가가 지금까지와 같은 강제력·무력의 독점자가 아니라, 평화로운 조정자가 된다면 이는 해체될 필요가 전혀 없다. 오히려, 꿈같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세계정부가 선다고 해도 언어문화 공동체별, 지역 공동체별 자율성은 강화돼야 한다. 그래서 평화로운 성격의 것으로 전환될 수만 있다면, 문화 다양성과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복지권의 보증자로서 국민국가의 존재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그런데 정작 유럽연합도 유럽 국가들 내부에서 평화적 관계를 강화하는 데는 효과적일지 모르지만, 대외적으로는 결코 평화적인 기구가 아니다. 미국과 유럽연합의 군사기구인 나토는 발트 3국에 이어 장차 우크라이나까지 포함하게 될 텐데, 그러면서 중앙아시아와 관련하여 러시아도 계속 견제하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국까지 겨냥한다. 미국은 유럽과 함께 나토를 통해 러시아와 중국을 서쪽에서 압박하고, 동쪽에서는 강화된 미-일동맹을 통해 중국(더 나아가 러시아까지)을 압박하고자 한다. 냉전시대의 동서 대립이 21세기에 들어 다소 유연해진 형태로, 그러나 거의 비슷한 구도로 되풀이될 전망이다. 한국은 신냉전의 한복판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국민국가의 개편 확대라든가 동맹의 재편성은 일어나고 있지만 국민국가의 해체는 지금으로서는 까마득한 일이다. 현 단계에서는 국민국가들의 평화·화해와 사안별 협력이 최선인데, 이는 민족자결권, 영토와 주권의 존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도 변함없는 원칙이다. 서양의 민족주의 비판론자들은 많은 경우-이른바 진보적인 논자들조차-미국 같은 최강자의 민족주의는 비판하지 않으면서 약소국의 저항적 민족주의만 비판하는 서양중심주의에 매몰되어, 그 논리를 아시아에도 그대로 적용한다. 그들에게서는 일본 민족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론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작은 나라들의 민족주의는 강자의 민족주의, 혹은 그 가장 폭력적 형태인 제국주의 때문에 강요된 것이다. 예를 들어 이라크의 민족주의와 미국 내셔널리즘, 어느 것이 평화교란의 원인인가? 민족들 간의 평화로운 관계가 확립되려면 패권주의적 강자의 정의부터 폐기해야 한다. 그리고 민족주의 극복은 약자의 정의를 세우는 데서 찾아야 한다.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이 말한 평화의 원칙은 여기서도 적용된다. “평화는 긴장의 부재가 아니라 정의의 현존이다.” 한정숙/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한겨레> 2005년 4월29일치
그런데 정작 유럽연합도 유럽 국가들 내부에서 평화적 관계를 강화하는 데는 효과적일지 모르지만, 대외적으로는 결코 평화적인 기구가 아니다. 미국과 유럽연합의 군사기구인 나토는 발트 3국에 이어 장차 우크라이나까지 포함하게 될 텐데, 그러면서 중앙아시아와 관련하여 러시아도 계속 견제하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국까지 겨냥한다. 미국은 유럽과 함께 나토를 통해 러시아와 중국을 서쪽에서 압박하고, 동쪽에서는 강화된 미-일동맹을 통해 중국(더 나아가 러시아까지)을 압박하고자 한다. 냉전시대의 동서 대립이 21세기에 들어 다소 유연해진 형태로, 그러나 거의 비슷한 구도로 되풀이될 전망이다. 한국은 신냉전의 한복판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국민국가의 개편 확대라든가 동맹의 재편성은 일어나고 있지만 국민국가의 해체는 지금으로서는 까마득한 일이다. 현 단계에서는 국민국가들의 평화·화해와 사안별 협력이 최선인데, 이는 민족자결권, 영토와 주권의 존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도 변함없는 원칙이다. 서양의 민족주의 비판론자들은 많은 경우-이른바 진보적인 논자들조차-미국 같은 최강자의 민족주의는 비판하지 않으면서 약소국의 저항적 민족주의만 비판하는 서양중심주의에 매몰되어, 그 논리를 아시아에도 그대로 적용한다. 그들에게서는 일본 민족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론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작은 나라들의 민족주의는 강자의 민족주의, 혹은 그 가장 폭력적 형태인 제국주의 때문에 강요된 것이다. 예를 들어 이라크의 민족주의와 미국 내셔널리즘, 어느 것이 평화교란의 원인인가? 민족들 간의 평화로운 관계가 확립되려면 패권주의적 강자의 정의부터 폐기해야 한다. 그리고 민족주의 극복은 약자의 정의를 세우는 데서 찾아야 한다.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이 말한 평화의 원칙은 여기서도 적용된다. “평화는 긴장의 부재가 아니라 정의의 현존이다.” 한정숙/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한겨레> 2005년 4월29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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