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의 우리문화 우리역사
사사로운 이익좇다가 공적으로
어떤 일에 공을 세운 사람을 칭찬하고 상을 내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고려나 조선 시대에는 이를 제도화하여, 국가나 왕실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그 공에 따라 등급을 정해 ‘공신’ 칭호를 주고, 토지와 노비를 내려 주었다. 어떤 왕을 위해 특별한 공을 세운 신하는 죽은 다음 신주를 종묘에 모셔서 그 왕과 함께 받들었으며, 그 자손이 죄를 지을 경우에는 벌을 감해 주기도 하였다.
공신은 여러 가지 경우에 추대되었다. 나라를 세우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은 ‘개국공신’으로 추대되었다. 고려와 조선이 들어선 다음 대규모의 개국공신이 추대되었다.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거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 어려움에 빠진 왕을 잘 받든 신하도 공신에 봉해졌다. 예컨대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에는 전쟁 중에 공을 세운 사람은 선무공신, 국왕이었던 선조를 의주까지 모시고 피난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은 호성공신에 봉해졌다. 이순신, 권율, 원균은 선무공신 1등, 전라우수사로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이억기와 진주성을 지켜내고 전사한 김시민 등은 선무공신 2등이었다. 이항복 등에게는 호성공신 1등, 윤두수 등에게는 호성공신 2등이 내려졌다. 고려 때도 거란의 2차 침공 당시 왕을 모시고 피난을 하였으며 3차 침입 때는 거란군을 크게 물리친 강감찬에게 공신의 칭호가 내려졌다.
많은 경우 공신은 국왕을 세우거나 권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보탠 사람들에 대한 포상의 성격을 띠었다. 조선 태종이 왕자 시절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으킨 두 차례의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이나, 수양대군이 정변을 일으켜 안평대군과 대신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할 당시 공을 세운 사람들을 공신으로 대접한 일은 이를 잘 보여 준다.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과 같이 반정을 일으켜 새로운 왕을 세우는 데 성공한 사람들도 당연히 공신이 되었다. 이때 공신은 결국 권력을 장악하는 데 힘을 보탠 사람들에 대한 논공행상이었던 것이다.
공신이 지닌 이런 속성은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공신이 된 사람들은 자신의 공을 내세워 조정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부를 축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정치에서 개혁을 앞세우더라도 이내 기존의 정치 행태를 되풀이하고 부정부패에 빠져드는 경우가 흔했다. 계속해서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려고 하다가 국왕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고려 광종이 개국공신이었던 호족세력을 제거한 것이나, 조선 태종이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기여한 공신들을 제거한 것은 그 결과였다. 반정세력에 의해 왕위에 올라, 공신이 된 반정세력에 휘둘리던 중종은 새로운 학자들을 등용하여 이들을 견제하고 개혁을 꾀하였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공신세력의 저항으로 또 다른 갈등과 숙청이 되풀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공신들이 공을 세운 자체에 만족하고 마음속으로 새기기보다는, 이를 이용하여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꾀하려고 한 데서 나온 결과였다. 한국교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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