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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라일락 진한 향기가 마음결 타고 스민다

등록 2005-05-08 18:17

바람 부는 날, 국어 시간에 묘사글을 쓰러 밖에 나갔다. 아이들을 꽃밭에 있는 라일락 앞에 앉게 했다. 교실을 벗어난 아이들은 마냥 즐거운 얼굴이다. 교실에서는 줄곧 입 다물고 말 한마디 하지 않던 아이들도 궁금한 게 있으면 서슴지 않고 물어 본다. “라일락을 왜 ‘수수꽃다리’라고 해요?” “선생님, 꽃밭에 들어가 수수꽃다리 냄새 맡으면 안 돼요?”

라일락을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 가서 잘 살핀 뒤 향기는 천천히 맡으라고 했지만 아이들은 좀처럼 앉아서 글을 쓰지 못한다. 자꾸 라일락 꽃을 만지고 코를 갖다 대기에 바쁘다. 바람이 세게 불어 공책이 날리고 머리카락이 날려 바람을 피해 몸을 웅크리거나 돌리곤 하지만 아이들은 조금도 싫은 기색이 없다. 온몸을 활짝 열고 해와 바람, 라일락 향기에 몸을 내맡기는 듯하다.

이날 기억이 강하게 몸에 남았던 걸까? 시를 쓰는 날 라일락을 글감으로 한 아이들이 많다. 준영이도 라일락을 글감으로 시를 썼다.

라일락 향기

학급에서 라일락 묘사글을 쓴다.

한번 잘 써보려고 라일락을 만진다.

네 갈래의 꽃잎이 맨질맨질하다.

꽃잎을 만지는데 여기저기서

향기가 좋다고들 한다.

‘어떤 냄새이길래?’

궁금한 마음으로 꽃 곁에 코를 댄다.

진한 향기가 내 코 속으로 은은히 퍼진다.

아직도 라일락 향기가 어슴푸레 남아 있다. (2005. 4. 29.)

(이준영/인천 남부초등학교 6년)

시를 보니 라일락 묘사글을 쓰던 날 준영이 마음결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잡힐 듯 훤하게 보인다. 준영이는 꽤 착실한 아이다. 숙제가 있으면 틀림없이 해 온다. 학교에서 해 내는 과제도 대충 해 내는 법이 없다. 준영이의 그런 태도는 시에도 잘 드러난다. 2행을 보면 ‘한번 잘 써보려고 라일락을 만진다’고 되어 있다. 정말 준영이는 선생님 말을 따라 라일락을 섬세하게 관찰한다.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 다가가서도 보고 만져 보기도 한다. 친구들은 라일락 꽃 향기를 맡느라 수선을 떠는데도 짐짓 모른 체하며 라일락 꽃잎이 맨질맨질하다는 것까지 알아낸다. 관찰에 열심이다.

하지만 친구들 소리에 마음이 흔들리고 만다.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라일락 곁에 다가선 준영이는 몇 번이고 코를 갖다 대던 아이들 마음을 알게 된다. 덩달아서 꽃 냄새를 맡기보다는 찬찬히 관찰하기에 여념이 없던 준영이는 참았던 마음 때문에 꽃 향기를 맡은 느낌이 한층 새롭다. 은은히 퍼지는 향기, 이제 라일락은 준영이 눈과 손이 아니라 마음결을 타고 스며들었다.

이 시를 아이들한테 보여 주니 한 아이가 지금 자기가 라일락 꽃 앞에 서 있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시에 담긴 준영이 마음이 아이들한테도 전해졌음이 틀림없다.

준영이는 처음에 라일락에 대해 글 한번 잘 써 봐야 하는 욕심 어린 마음으로 글쓰기를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라일락 향기에 푹 빠져 버렸다. 마지막 연을 읽으면 어쩐지 라일락 향기가 은은하게 나는 듯하다. 강승숙/인천 남부초등학교 교사 sogoch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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