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받고싶은 선물은 ‘믿음’입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아름다운 관계의 바탕이 되겠지요.”
침대에 누워 잠이 들려 할 때/방에 아버지가 들어오신다./옆에 누웠다./“아들아, 자냐?”/“네….”/잠시 침묵이 흐른다./“태환아 아빠가 어렵냐?”/“아니요….”/기어 들어가는 내 목소리/아빠는 나의 머리를 팔베개한다./술 냄새가 난다. (김태환 ‘아버지’)
오늘 우리 반 아이가 국어 시간에 써낸 시입니다. 읽다가 코끝이 찡했습니다. 나도 이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껏 술에 취해 들어와서야 아들이 안쓰러워 곁에 다가가 봅니다만 부자간의 ‘마음 문’은 잘 열리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성적 시원찮은 아이가 못 미더워 늘 공부 닦달만 하고 있었으니까요. 아이도 닦달만 하는 아버지에게 기대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부모들은 아이를 믿고 기다려 주지 않으려 합니다. 때를 놓치면 아무것도 못하고 만다는 강박감에 안달하지요. 선생들은 부모보다는 아이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부모만큼 욕심을 부리지는 않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학부모와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자기 아이만은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허망한 믿음, 자기 아이는 못된 짓을 할 리가 없다는 믿음,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친구의 꾐 때문일 것이라는 믿음이 가득하지요. 자기는 정작 아이를 믿어 주지 않으면서 담임 앞에서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욕심 아닐까요?
나는 사람들이 의사에 대한 믿음의 반의 반 정도라도 선생을 믿어 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모두가 스스로 교육 전문가라고 생각하고 있는 현실에서 선생의 말은 먹혀들지 않습니다. 그러니 ‘선생은 출석만 불러라, 내 아이는 학원과 과외로 키우겠다’고 생각하지요. 모두가 일류 기업의 사원이 되고 의사 검사가 되고자 한다면 이 세상은 누가 꾸려 갑니까? 이 뻔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내 아이만은 일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학부모 앞에 선생은 말을 잃게 되고, 아이들은 다시 학원으로 끌려가야 합니다.
학부모 가운데는 아이를 학교에 볼모로 잡혀 두기나 한 듯이 선생 앞에 쩔쩔매는 분이 있습니다. 남다른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아이가 불이익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이 선생을 믿어 주겠습니까? 선물만 들이밀 줄 알았지, 서로 믿음을 가지고 아이 키워 가는 일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분, 주로 학교에서 임원을 맡은 분들이 대개 그러한데요, 선생들의 사기를 자기들만이 높여 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걸핏하면 회식 자리를 마련하려고 듭니다. 그런 자리에서 진정으로 교육의 문제를 얘기해 본 적은 내 경험으로는 없습니다. 절망만 안고 돌아옵니다. 얼마 전, 이웃 아주머니가 나를 선생이랍시고 찾아와 하소연을 합니다. 애가 초등학교 저학년인데 담임 선생이 하도 어이없는 것을 과도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학부모들이 모여서 고발을 하기로 했답니다. 자기들이 해 준 것들을 적으면서 서로들 놀랐답니다. 그런데 문제가 불거지자 담임과 교장이 먼저 일을 얼버무리기 위해 급히 학부모들을 불러 달래고 얼렀고, 정작 감사가 나오자 함께 고발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모두 발을 빼더랍니다. 자기 혼자만 사실대로 밝히다 보니 사건 전모는 간데없고 자기가 담임을 모함한 일로 사건이 꼬여 가더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그 담임 선생은 당장 쫓겨나야 할 일이지요. 나는 이웃 아주머니의 말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런 교사가 없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학부모들도 원망스럽습니다. 왜 이런 교사를 당당하게 고발하지 못합니까? 모나게 설쳤다가는 졸업할 때까지 고생이다 싶어서입니까? 선생들을 그렇게 못 믿는지요? 그렇다면 학부모들도 끝내 문제 교사를 만들어 간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일 아닌가요? 사람살이에서 가장 중히 여겨야 할 것이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일이랍니다. 가장 아름다운 관계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쌓아 가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 믿음은 진실을 밝혀 가는 데서 출발할 것입니다. 이상석/부산 경남공업고등학교 교사
학부모 가운데는 아이를 학교에 볼모로 잡혀 두기나 한 듯이 선생 앞에 쩔쩔매는 분이 있습니다. 남다른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아이가 불이익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이 선생을 믿어 주겠습니까? 선물만 들이밀 줄 알았지, 서로 믿음을 가지고 아이 키워 가는 일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분, 주로 학교에서 임원을 맡은 분들이 대개 그러한데요, 선생들의 사기를 자기들만이 높여 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걸핏하면 회식 자리를 마련하려고 듭니다. 그런 자리에서 진정으로 교육의 문제를 얘기해 본 적은 내 경험으로는 없습니다. 절망만 안고 돌아옵니다. 얼마 전, 이웃 아주머니가 나를 선생이랍시고 찾아와 하소연을 합니다. 애가 초등학교 저학년인데 담임 선생이 하도 어이없는 것을 과도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학부모들이 모여서 고발을 하기로 했답니다. 자기들이 해 준 것들을 적으면서 서로들 놀랐답니다. 그런데 문제가 불거지자 담임과 교장이 먼저 일을 얼버무리기 위해 급히 학부모들을 불러 달래고 얼렀고, 정작 감사가 나오자 함께 고발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모두 발을 빼더랍니다. 자기 혼자만 사실대로 밝히다 보니 사건 전모는 간데없고 자기가 담임을 모함한 일로 사건이 꼬여 가더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그 담임 선생은 당장 쫓겨나야 할 일이지요. 나는 이웃 아주머니의 말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런 교사가 없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학부모들도 원망스럽습니다. 왜 이런 교사를 당당하게 고발하지 못합니까? 모나게 설쳤다가는 졸업할 때까지 고생이다 싶어서입니까? 선생들을 그렇게 못 믿는지요? 그렇다면 학부모들도 끝내 문제 교사를 만들어 간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일 아닌가요? 사람살이에서 가장 중히 여겨야 할 것이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일이랍니다. 가장 아름다운 관계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쌓아 가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 믿음은 진실을 밝혀 가는 데서 출발할 것입니다. 이상석/부산 경남공업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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